책 속으로
그해 겨울, 47일 동안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칼의 노래, 현의 노래의 작가 김훈이 3년 만에 발표한 신작 장편소설. 병자호란 당시, 길이 끊겨 남한산성에 갇힌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다툼,...
나의 평가
이 책은..
몇달 째 벼르던 책이다. 이저런 이유로 책장을 넘기지 못하다가 집안 일로 하루를 시골집에서 묵으며 하룻밤에 읽어내렸다. 모처럼 밤을 새워가며 책장을 넘기는 참재미를 맛보았다.
#-1.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한 달 보름여의 고민...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사관이 남긴 이 한 문장이 오롯이 가슴에 와 박힌다. 작가 또한 이 문장에 맘을 빼앗겼던지 곳곳에 이 문장으로 마침표를 대신하고 있다. 한달 보름여를 '산성'에 들앉아 임금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또한 그 아래 대소신료들은? 문득, 산성의 행궁터를 떠올리며 그 아래 머리를 조아려본다. 내가 신하였더라면...내가 임금이었다면...나는 ...다시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가 무겁게 머리를 누른다.
인조14년 병자년 겨울...그렇게 <남한산성>에서 죽을 것 같은 고민을 껴안고 한달 보름여를 산 자들이 있다. 그 안에 우리 임금이 있었고, 우리 선조들이 있었다. '생과 사'가 공존할 수 없는...그리하여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 작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풀어놓았다.
-'백성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은 말들이 다시 주려서 굶어 죽고, 굶어 죽은 말을 삶아서 군병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 죽는 순환의 고리...'(p.93).
살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야 하는 그 순간에 '죽음'은 우리의 일상 가장 가까이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한 발만 떨어져 보면 우리의 일상은 곧 삶과 죽음이 한덩이로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될 터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보다. 이 작가처럼 삶을 통찰하는 눈을 나는 평생 지닐 수 있을까?
#-2. 척화파 VS 화친파-김상헌과 최명길
병자년 이후, 조선이 지금의 역사처럼 500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 때문인가? 만약, 김상헌의 주장대로 끝까지 청에 저항하여 끝내 '죽음'을 선택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씌어졌을까?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p9).
작가의 표현처럼 청의 지배 아래, 들에서 풀뿌리를 캐며 살았을 백성들의 가슴에 '종묘사직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이 싹틀 수 있었을까?. 행여 그러하다 해도, 또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누대로 흘려야 했을까? 그러고보면 화친파의 외교책은 가장 경제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아래 대목에서는 절로 눈에 핏발이 선다.
-'조선 왕은 황색 일산 앞에 꿇어앉았다.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칸이 술 석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한 잔에 세 번씩 다시 절했다. 세자가 따랐다. 개들이 황색 일산 안으로 들어왔다. 칸이 술상 위로 고기를 던졌다. 뛰어오른 개가 고기를 물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아, 잠깐 멈추라.
조선 왕이 절을 멈추었다. 칸이 휘장을 들치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서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춤을 여미었다. 칸은 다시 일산 안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칸이 셋째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남은 절을 계속했다.'(p.356).
...이런 젠장~.
절로 욕이 나온다. 정작 저 야만스런 놈 앞에 우리의 왕이 이런 수모를 겪었단 말인가! '소설', '소설', '이건 소설이다'...'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작가의 일러두기를 되뇌면서도 두 눈에 핏발이 선다. 그러나 어찌하랴. 역사는 강한 자들의 기록이고, 강한 자는 최후로 살아남은 자를 일컫는다 했으니, 청의 저 칸이 저리 야만스러워도 정작 장구한 대륙(중국)의 제국 역사는 청이 완결짓지 않았던가! 다만, 시대를 읽어내지 못한 '조선 왕'의 좁은 안목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생각이 이 즈음 이르러고 보니, 핏발 선 눈은 새벽녘까지 읽어내리는 벼락독서 때문이겠거니, 하는 위안이 생기기도 했다.
#-3. '산 것과 죽은 것들의 구분없음'.
김훈의 문장은 대체로 짧다. 그래서 속도감이 있다. 자칫 짧은 문장들의 나열은 내용 전개를 삭막하게 만들 수 있다. 부각돼야 할 장면의 묘사나 중심 사건의 서사에서 짧은 문장은 오히려 내용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도 김훈은 일관되게 짧은 문장들을 이용해 내용 전개를 절묘하게 그려낸다. 그래서인지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들을 읽다보면 한 편의 '무협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이는 그의 부친(그의 부친은 무협소설가로 유명했다고 하니)으로부터 생래적으로 타고난 기질일 수도 있을 테고, 오랜 기자생활에서 후천적으로 다듬어진 공격적 글쓰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저러한 이유를 다 떼고, 무엇보다 김훈의 글들이 매력적인 것은 '산 것'과 '죽은 것'들의 '구분없음'이라 하겠다. 그의 짧은 문장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문장과 문장이 생동감있게 어우러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구분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구분없음'이란 무엇인가? 아래에 인용한 몇 개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문장으로 발신(發身_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p.9).
-'산줄기들은 가까이 다가와 성을 겹으로 외호했고, 물은 동쪽으로 흘러서 성 밖 들에 닿았다. 산이 물러서며 성 안팎으로 길이 열리는 자리가 조붓했다. 들이 헤벌어지지 않아서 산과 들은 옷깃을 여미고 맞아들이는 형국이었다.'(p.33).
-'순한 물은 여름에도 땅을 범하지 않았다.'
-'바람이 마른 숲을 흔들어 나무와 눈이 뒤엉켰다. 눈에 눌린 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가 장지문 창호지를 흔들었다. 바람이 골을 따라 휩쓸고 내려가면 바람의 끝자락에서 나무들이 찢어졌다.'(p.179).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솟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p.179).
옮긴 문장들에서 '주어'는 모두 사물이거나 무생물이다. 그럼에도 그에 호응하는 서술어들은 '움직씨'로 표현되었다. 짧은 문장 안에 부려놓은 이러한 '주-술' 호응들이 김훈의 문체를 살아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들이 다 그러했다. 한 번 펼쳐들면 막힘없이 읽히는 힘도 여기에 있다.
#-4. 구겨진 말의 시대에...
평이한 단어들이 화려한 수식보다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김훈의 소설들에서 배웠다. 작가는 그러한 글쓰기의 힘을 야만스러운 '칸'의 입을 빌려 내뱉고 있다.
-'칸은 고사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p.284).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p.284).
-'글을 곧게 써라.(p.327)
작가는 이러한 글쓰기의 태도를 왜 하필 '칸'의 입을 빌려 말하고자 했을까? 필요없는 말이 너무 많은 시대, 그리하여 정작 필요한 말들이 살아 움직여야 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소위 '아는 체 하는 것'들은 '필요한 말'을 삼킨 채, '필요없는 말'들만 무성히 지어놓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숱한 말들이 정작 '무력' 앞에선 '무기력'해져버리고 마는 현실.
'이상'을 꿈꿔야 하는 이 나라의 10대들이 '조폭의 보스'를 장래 희망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세태속에서, 우리는 어떤 말이 필요한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선비의 수려한 문장보다는 '칸'의 담백한 문장이 마음을 끄는 세상이다. 선비도 없고, 참 선비를 알아주는 왕도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섬길 왕이 없는 이 나라 백성들은 '왕'이 부도덕해도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해 주면 그 왕을 섬기겠다고, 어느 설문조사 결과가 보도된 바 있다.
지금, 우리가 '남한산성'에 있는가?'
-2007. 9. 16(일), 새벽 <남한산성>을 나오다.
#-1.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한 달 보름여의 고민...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사관이 남긴 이 한 문장이 오롯이 가슴에 와 박힌다. 작가 또한 이 문장에 맘을 빼앗겼던지 곳곳에 이 문장으로 마침표를 대신하고 있다. 한달 보름여를 '산성'에 들앉아 임금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또한 그 아래 대소신료들은? 문득, 산성의 행궁터를 떠올리며 그 아래 머리를 조아려본다. 내가 신하였더라면...내가 임금이었다면...나는 ...다시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가 무겁게 머리를 누른다.
인조14년 병자년 겨울...그렇게 <남한산성>에서 죽을 것 같은 고민을 껴안고 한달 보름여를 산 자들이 있다. 그 안에 우리 임금이 있었고, 우리 선조들이 있었다. '생과 사'가 공존할 수 없는...그리하여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 작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풀어놓았다.
-'백성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은 말들이 다시 주려서 굶어 죽고, 굶어 죽은 말을 삶아서 군병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 죽는 순환의 고리...'(p.93).
살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야 하는 그 순간에 '죽음'은 우리의 일상 가장 가까이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한 발만 떨어져 보면 우리의 일상은 곧 삶과 죽음이 한덩이로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될 터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보다. 이 작가처럼 삶을 통찰하는 눈을 나는 평생 지닐 수 있을까?
#-2. 척화파 VS 화친파-김상헌과 최명길
병자년 이후, 조선이 지금의 역사처럼 500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 때문인가? 만약, 김상헌의 주장대로 끝까지 청에 저항하여 끝내 '죽음'을 선택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씌어졌을까?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p9).
작가의 표현처럼 청의 지배 아래, 들에서 풀뿌리를 캐며 살았을 백성들의 가슴에 '종묘사직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이 싹틀 수 있었을까?. 행여 그러하다 해도, 또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누대로 흘려야 했을까? 그러고보면 화친파의 외교책은 가장 경제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아래 대목에서는 절로 눈에 핏발이 선다.
-'조선 왕은 황색 일산 앞에 꿇어앉았다.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칸이 술 석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한 잔에 세 번씩 다시 절했다. 세자가 따랐다. 개들이 황색 일산 안으로 들어왔다. 칸이 술상 위로 고기를 던졌다. 뛰어오른 개가 고기를 물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아, 잠깐 멈추라.
조선 왕이 절을 멈추었다. 칸이 휘장을 들치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서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춤을 여미었다. 칸은 다시 일산 안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칸이 셋째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남은 절을 계속했다.'(p.356).
...이런 젠장~.
절로 욕이 나온다. 정작 저 야만스런 놈 앞에 우리의 왕이 이런 수모를 겪었단 말인가! '소설', '소설', '이건 소설이다'...'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작가의 일러두기를 되뇌면서도 두 눈에 핏발이 선다. 그러나 어찌하랴. 역사는 강한 자들의 기록이고, 강한 자는 최후로 살아남은 자를 일컫는다 했으니, 청의 저 칸이 저리 야만스러워도 정작 장구한 대륙(중국)의 제국 역사는 청이 완결짓지 않았던가! 다만, 시대를 읽어내지 못한 '조선 왕'의 좁은 안목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생각이 이 즈음 이르러고 보니, 핏발 선 눈은 새벽녘까지 읽어내리는 벼락독서 때문이겠거니, 하는 위안이 생기기도 했다.
#-3. '산 것과 죽은 것들의 구분없음'.
김훈의 문장은 대체로 짧다. 그래서 속도감이 있다. 자칫 짧은 문장들의 나열은 내용 전개를 삭막하게 만들 수 있다. 부각돼야 할 장면의 묘사나 중심 사건의 서사에서 짧은 문장은 오히려 내용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도 김훈은 일관되게 짧은 문장들을 이용해 내용 전개를 절묘하게 그려낸다. 그래서인지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들을 읽다보면 한 편의 '무협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이는 그의 부친(그의 부친은 무협소설가로 유명했다고 하니)으로부터 생래적으로 타고난 기질일 수도 있을 테고, 오랜 기자생활에서 후천적으로 다듬어진 공격적 글쓰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저러한 이유를 다 떼고, 무엇보다 김훈의 글들이 매력적인 것은 '산 것'과 '죽은 것'들의 '구분없음'이라 하겠다. 그의 짧은 문장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문장과 문장이 생동감있게 어우러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구분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구분없음'이란 무엇인가? 아래에 인용한 몇 개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문장으로 발신(發身_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p.9).
-'산줄기들은 가까이 다가와 성을 겹으로 외호했고, 물은 동쪽으로 흘러서 성 밖 들에 닿았다. 산이 물러서며 성 안팎으로 길이 열리는 자리가 조붓했다. 들이 헤벌어지지 않아서 산과 들은 옷깃을 여미고 맞아들이는 형국이었다.'(p.33).
-'순한 물은 여름에도 땅을 범하지 않았다.'
-'바람이 마른 숲을 흔들어 나무와 눈이 뒤엉켰다. 눈에 눌린 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가 장지문 창호지를 흔들었다. 바람이 골을 따라 휩쓸고 내려가면 바람의 끝자락에서 나무들이 찢어졌다.'(p.179).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솟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p.179).
옮긴 문장들에서 '주어'는 모두 사물이거나 무생물이다. 그럼에도 그에 호응하는 서술어들은 '움직씨'로 표현되었다. 짧은 문장 안에 부려놓은 이러한 '주-술' 호응들이 김훈의 문체를 살아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들이 다 그러했다. 한 번 펼쳐들면 막힘없이 읽히는 힘도 여기에 있다.
#-4. 구겨진 말의 시대에...
평이한 단어들이 화려한 수식보다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김훈의 소설들에서 배웠다. 작가는 그러한 글쓰기의 힘을 야만스러운 '칸'의 입을 빌려 내뱉고 있다.
-'칸은 고사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p.284).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p.284).
-'글을 곧게 써라.(p.327)
작가는 이러한 글쓰기의 태도를 왜 하필 '칸'의 입을 빌려 말하고자 했을까? 필요없는 말이 너무 많은 시대, 그리하여 정작 필요한 말들이 살아 움직여야 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소위 '아는 체 하는 것'들은 '필요한 말'을 삼킨 채, '필요없는 말'들만 무성히 지어놓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숱한 말들이 정작 '무력' 앞에선 '무기력'해져버리고 마는 현실.
'이상'을 꿈꿔야 하는 이 나라의 10대들이 '조폭의 보스'를 장래 희망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세태속에서, 우리는 어떤 말이 필요한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선비의 수려한 문장보다는 '칸'의 담백한 문장이 마음을 끄는 세상이다. 선비도 없고, 참 선비를 알아주는 왕도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섬길 왕이 없는 이 나라 백성들은 '왕'이 부도덕해도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해 주면 그 왕을 섬기겠다고, 어느 설문조사 결과가 보도된 바 있다.
지금, 우리가 '남한산성'에 있는가?'
-2007. 9. 16(일), 새벽 <남한산성>을 나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