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읽기... 12

이주은, <그림에 마음을 놓다>

누군가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몇 가지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책이다. 책들 가운데서도 누군가에게 꼭 선물하고픈 책들도 있고, 내 생의 마지막 날, 의식 치르 듯 책장 표지를 한 번 쓰다듬어 보고픈 책도 있다. 그래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님에도 책장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이 미련스러운 미련을 언제쯤에나 떨칠 수 있을지... 이주은의 (앨리스, 2008). 이 책은 누군가에게 선물로 전하고픈 책 가운데 하나다. 처음 출간된 게 2008년이니 그동안 주변인들에게 참 많이 선물했지 싶다. 요새 와서 돌이켜보니 책 선물이 더 이상 선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뒤늦은 깨달음. 그러고보니 언제부터인가 책 선물을 주고 받는 일도 거의 없다시피 돼버렸다. 이 책은 '사랑, 관계, 자아'의 세 영역..

산문 읽기... 2022.07.02

김영하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잠을 설치는 날이 잦다. 딱히 열대야도 아니고 카페인 섭취가 많은 것도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잠을 놓치고 있다. TV가 없는 거실에 멀뚱히 앉아 냥이놈만 괴롭히다가 문득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는 책장으로 눈길이 갔다. 주섬주섬 버릴 만한 책들을 고르다가, 채 읽지 못한 책들이라 바닥에 쌓아 두기 시작했다. 이 책도 그 가운데 하나다. 2010년도 출간이니 벌써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그럼에도 어찌 이리 깔끔한지...ㅋㅋ 모두 13개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어떤 건 한 바닥 짜리도 있다(파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읽다 보니 어느 에피소드에선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아마 뒤적뒤적 여기저기를 읽었던가 보다. 이 책에도 김영하 특유의 가벼움과 위트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예전엔 그 위트가..

산문 읽기... 2022.06.30

(시론) 도시를 디자인하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라발 지구는 산업혁명기에 급속도로 몰려든 이민자들이 모여 형성된 동네였다. 좁은 골목을 끼고 작은 아파트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선 이 거리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데다 치안이 좋지 않아 현지인들조차 출입을 꺼리던 곳이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바르셀로나 시가 '아름다운 라발 만들기' 운동을 기획했고, 디자이너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이어져 지금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트렌디한 곳이 되었다. 독일 뒤스부르크는 유럽 최대 규모의 '티센 제철소'가 자리잡고 있었으나, 80년대 들어 철강산업의 몰락으로 약 60만 평에 이르는 이 제철소는 독일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라인강변에 늘어선 채 벌겋게 녹슬기 시작한 거대한 철강 구조물은 흉물로 전락했다. 폐공장 터를 세계가 주목하는 지금의 환..

산문 읽기... 2022.03.13

가상으로의 도피, '메타버스'(Metaverse)

짐 캐리 주연의 영화 (1998년 개봉)는 영화사 100년에 손꼽을 만한 작품으로 남았다. 코믹스러운 짐 캐리의 다채로운 표정 끝에 드러나는 가공의 현실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슬픔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소소한 일상에 설레고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하던 트루먼의 일상이, 실제로는 거대한 세트 장 안에서 이루어진 각본의 결과였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허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정이 보장된 세트장 안의 삶을 거부하고 과감히 세트장 밖의 불확실한 삶을 선택하는 트루먼에게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규정되지 않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다음 해에 개봉된 영화 (1999년 개봉)는 파격적인 카메라 연출 기법과 CG가 접목된 화려한 영상으로 ..

산문 읽기... 2021.09.29

'스타벅스 '와 인문학마케팅

커피 마니아로 익히 알려진 고종이 커피를 처음 맛 본 것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관에서였다고 하니, 우리나라 커피 역사의 시작은 그리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로부터 100년.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커피 시장이 되었다. 특히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인 스타벅스는 대한민국에서도 최고의 브랜드가 되었다. 1999년 이화여대 앞에 1호점이 문을 연 이후 20여 년 동안, 매장은 총 1500여 개로 늘었고 매출은 2조 원에 이른다. 문득, 스타벅스의 마케팅 전략이 궁금해진다. '스타벅스'라는 이름은, 멜 빌의 소설 에 나오는 일등항해사의 이름인 '스타벅'에서 따왔다. 영어 교사(제리 볼드윈), 역사 교사(지브 시글), 작가(고든 보커) 들로 구성된 스타벅스의 설립자들은, 갑판 위에서 늘..

산문 읽기... 2021.09.02

『페스트』와 『눈 먼 자들의 도시』, 그리고 '코로나'

194X년 4월 16일 아침, 평온하기 그지없는 알제리의 해안 도시 '오랑'.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을 나서다가 피를 토하고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발견한다. 병원을 관리하는 수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리외는 퇴근길 자신의 집 복도에서도 피를 토하고 쓰러진 쥐를 발견하고선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다. 그리고 며칠 뒤, 도시는 온통 피를 토하는 쥐들의 사체로 덮이기 시작했다. 페스트의 시작이었다. 평온하기 그지없던 이 조용한 해안 도시는, 사람들의 곁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 쥐들로 인해 순식간에 공포의 도시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도시는 봉쇄되었고, 봉쇄된 도시 안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 절망과 죽음이 혼돈하는 재앙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19..

산문 읽기... 2021.03.25

소설,알렉산드리아ㅡ이병주

한국의 발자크를 자처하던 작가 이병주는 박정희, 황용주와 더불어 삼총사라 불릴 만큼 돈독한 술친구들이었다. 이후, 스스로 공산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공'을 극단적으로 밀어부친 박정희는 그 돈독했던 술친구들을 '반공법 위반'의 죄목으로 칼을 씌웠다. 5.16의 모사책으로 알려진 황용주와 박정희는 대구사범 동기간이었다. 부산일보 편집국장이었던 황용주의 주선으로 당시 국제신문 주간이었던 이병주와 셋은 절친한 술친구가 되었다. 황용주가 5.16의 핵심 모사책(정수장학회 강탈 책임자)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박정희는 그와 이병주를 반공의 칼날 앞으로 내몰았다. 황용주는 금세 풀려났으나 이병주는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평생을 박정희에 대한 원망을 풀지 않았다는 이병주는 그 원한을 그의 데뷔작, 에 고스란히..

산문 읽기... 2020.09.05

황용주 평전ㅡ그와 박정희의 시대

이런 시대가 있었다....60년 전에.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을 움직이는 건, 혈연, 학연, 지연... 죽어라~고 좋은 대학을 보내려는 것은 그 노력의 순수한 대가보다는 그 인맥, 학맥 속으로 편입되고픈 자본적 경제 논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인맥들이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그나마 소박한 이기심일 것이다. '민중을 위하여' '국민을 위하여' 라는 테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민중, 혹은 국민을 위한 적이 없다. 지금도 말끝마다 '국민'을 입에 올리는 자들 치고 정작 국민의 발끝 아래 엎드리는 자들은 없다.

산문 읽기... 2020.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