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 떠돌기...

내 맘에 곰삭은 풍경 하나...<한계령>

naru4u 2008. 8. 6. 12:57

 

 

 

 

 

먼 길이었습니다.

휴가를 맞아 이 폭염속을 헤집고 참으로 먼 길을 올랐습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5남매가 저마다의 가족들을 이끌고 속초 바닷가로 모여든 요며칠이었습니다.

숙소로비에서 갑작스레 터져나오는 경상도 억양의 반가운 감탄사들...

"야~ 잘 살았나...반갑데이...하~따야 이기 울매만이고..."

매형들끼리, 남매들끼리, 조카들끼리...ㅋㅋㅋ...

 

이튿날엔 설악산 자락을 헤집고 다니다가 덜컥, '한계령'을 만났습니다.

그쪽 지리에 낯설기만 했던 터라, '한계령'이 그리 가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한계령...

훌쩍 20여년 전 너머로 기억이 달음질쳐 까까머리 고등학교 2학년 하나를 데려옵니다.

부산에서 12시간...동해안 국도를 따라 구불구불 하루종일 관광버스 안에서 구불거린 시간이었습니다.

한계령을 그렇게 처음 넘었습니다.

 

안개 자욱한 한계령 골짝 사이 유령집처럼 적막하기만 했던 한계령 휴게소...

여학생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만이 넘쳐나던 부산 촌놈의 고교생들이 서울말 쓰는 여학생들과 어쨌든지 사진 한 장 찍어보려고

휴게소 언저리를 맴돌았던 기억...이름도 모르는 여학생과 그저 사진 한 장 찍는 것만으로도 동급생들 사이에 영웅이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뒤, 두고두고 그 사진의 배경으로 남은 한계령을 가슴 속에 새겼습니다.

시커먼 외양에 볼품없는 판자로 뚝딱뚝딱 못질을 한 듯한...그러나 그 볼품없는 적막이 수십 년 가슴에 더께처럼 앉았더랬지요.

어쩌면 그것은 한계령의 풍경이 아니라, 낯 모르는 여학생에게 가슴을 설레고 말던 그 때의 그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도...

 

맘 속의 더께를 하나씩 벗겨내듯 한계령으로 오르는 구비구비를 돌아들었습니다. 20여년 전 까까머리 고교생이, 낯모르는 여학생 옆에서 어줍잖게 포즈를 취하던 그 부끄럼 많던 남학생이, 이젠 아이 아빠가 되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어 한계령을 올랐습니다.

시간이 쉴새없이 흘렀고, 사람도 변해버린 세상이지만, 고맙게도 한계령과 그 볼품없던 휴게소만은 그대로여서 얼마나 가슴 벅찼던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환경에 따라 적응해야 하는게 현대인들의 나날살이라고는 하지만, 가끔은 내 안의 저 묵은 풍경처럼 나도, 내 주변의 사람들도 한결같은 모습 하나쯤은 고집스레 지켜나갔으면 하는 생각이 내 일상에 맺힌 어느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