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는 늘 마음 한구석에 좀체 녹지 않는 고드름 한 조각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봄, 여름, 가을의 풍경보다 겨울의 강원도가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까닭이다. 발목이 푹푹 빠지던 동해의 어느 골목길. 시멘트 담벼락 사이로 흑백사진처럼, 가늘게 이어지던 골목길 풍경. 불빛 하나 없는 태백산 산줄기를 하염없이 덜컹거리며 달리던 비둘기호의 퀘퀘한 냄새,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산도로를 빨간 완행버스로 하염없이 올랐던 그때, 차창으로 흐르던 겨울 눈더미 속의 탄광빛 개울들...멀미가 잦던 스물 한 살 때의 강원도 기억들이다.
2년 여의 학과 조교 생활을 마치고 불쑥, 그 기억을 따라 올랐던 또 한 번의 강원도. 캄캄한 어둠 속에 수십 개의 주황빛 실내등을 띠처럼 두르고 달리던 무궁화호. 오가는 차편도 드물던 동강 어라연을 찾아 하염없이 걸었던 수킬로미터의 산길들. 낯선 길을 곁에서 안내하며 조그만 귓속말로, 때론 침묵으로 이정표를 대신해 주던 동강의 굽이진 물줄기들. 적막하기 이를 데 없던 그 깊은 골짝에서 느꼈던 외로움.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였던 그날, 내 인생의 물줄기 하나가 그 동강의 물줄기를 닮았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지친 몸으로 돌아온, 단청빛 곱던 영월역사에서 젖은 신발을 널어놓고 잠깐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던 그 초라했던 30대. 막막하고 슬프기만 했던 날들...영월역 앞 장터에서 국밥을 한 그릇 시켜놓고선 마시지도 못하던 소주 한 병을 곁들여 제법 취객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던 객기어렸던 스물 아홉, 혹은 서른 즈음의 기억들.
그렇게 또 십 수 년이 훌쩍 넘어, 강원도의 봄은 화사했고 길들은 옛 서정을 모두 흩어버린 채 성형한 미인의 얼굴마냥 그저 반듯반듯, 뚜렷하기만 했다. 그러고보면 길만 변한 게 아니라, 그 길을 걷는 나부터 변해있었던 셈이다. 도시문명에 길들여진 시간 관념으로, 그 반듯한 길들을 기계의 힘으로 찾아다니며 잠깐의 수고로움도 피해가고자 했던 여정.
그 길들 끝에 막장처럼 매달려있던 탄광촌들은 이제 '관광, 문화, 재생' 등과 같은 단어들로 치장되어 있어 예전의 그 아련하고도 애틋했던 서정을 더 이상 불러오지는 않았다. 그들의 삶, 그 흑백영화같던 삶들은 이제 몇 평의 기념관 안에 박제되어 버렸고, 길 위를 오가는 숱한 여행객들을 하나라도 더 불러들이기 위한 호객행위들을 갖가지 브랜드들이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내 안에 옹차게 매달려 있던 고드름 조각을 녹여낼 수 있을 것같다. 그래서 강원도는 더 이상 겨울풍경으로만 기억되진 않을 것도 같다. 그게 안도일지, 아쉬움일지는 조금 더 살아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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