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꽃다지’를 위한,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1. 어린 것들의 자리...
이십대의 첫 겨울. 친구의 진학 때문에 밀양으로 동행하게 되었던 나는, 가난했던 내 친구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대학 생활이 그네 살림만큼이나 주름지고 팍팍할 것이라 여겼다. ‘시(密陽市)’라는 행정명은 번듯했으나 내 눈에 비친 밀양은, 바싹 마른 강물줄기가 들녘 목구멍을 감질나게 축이며 흐르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서면 신작로를 따라 늘어선 가게 유리창들은 분단장한 작부의 얼굴마냥 뽀오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아직도 70년대식 간판들을 무겁게 이고 있었다. 또래이거나 혹은 우리들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제 몸집보다 큰 오토바이를 몰면서 골목 끝에서 나타났다가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풍경 또한 읍내 규모의 시골 풍경을 꾸려주는 한 살림이기도 했다.
구부러진 골목 끝, 마루가 높았던 자취집에 친구의 살림을 내렸던 날 밤, 우린 서툴게 술에 취했고, 이따금씩 손톱으로 들녘을 긋고 지나는 밤열차 소리에 잠을 설쳤다.
그렇게 밀양은 내 삶의 연고가 되었고, 그 후로 나는 스무 살이 치러야 했던 치졸한 고민의 시간들과 밀양에서 자주 뒹굴었다. ‘마루 높은 집’ 친구의 골방은 도시의 것들에게서 도망친 대학생이 고민스런 표정으로 웅크려 숨기엔 제법 그럴싸한 배경이 되어주었으니까.
그 때부터였나보다. 막막하기만 하던 밀양의 들녘과 그 들녘을 안타깝게 적시던 남천강 물줄기. 그리고 밤이면 신경질적으로 들녘을 할퀴고 지나던 밤열차 소리……. 그 모든 것들이 내 젊은 날의 한 때와 어우러져 결코 잊히지 않는 풍경이 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흐릿한 꿈 마냥 되살아오게 된 것은. 그리하여 이제 내게 ‘밀양’은 가 볼만한 곳을 묻는 이들에게 서슴지 않고 손꼽아 내미는 곳이 되었고, 그 언저리를 오가며 맺은 크고 작은 인연들로 인해 나의 또 다른 삶터가 되어버렸다.
오래도록 ‘문학’이라는, 혹은 ‘문학판’이라는 것에서 멀찌감치 서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본 것은 ‘이응인’이라는 이름 석자에 눈길이 잡힌 까닭이다. 십여 년 전, 남천강이 환히 내려다뵈던 어느 카페에서 시인을 처음 뵈었다. 몇 살 어린 내 눈에 말갛다 못해 앳되 보이기까지 했던 그날의 시인은 꼭 챙겨듣지 않으면 놓쳐버리고 말 정도의 높낮이로 꼭 필요한 말만 내었다. 집으로 돌아와 시인의 시들을 챙겨 보면서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얇은 두 입술로 옮기기엔 너무 무거운 이야기들이 그의 시 안에 부려져 있다는 것을.
이후로 십년. 그 사이 시인은 그의 생을 두 권의 시집으로 엮었고, 이제 또 하나의 생을 엮어 세상에 내놓았다. 『어린 꽃다지를 위하여』(신생, 2006 봄)가 그것이다. 시집 제목부터 시인의 연륜을 느끼게 한다. 첫 시집『투명한 얼음장』(1993)부터 이후로 펴낸『따뜻한 곳』(1997),『천천히 오는 기다림』(2001) 들은 시인이 자신의 삶 한가운데 떡, 하니 지키고 앉아 주변의 것들에게 사유를 옮기는 시들로 빼곡하다. 그러나 『어린 꽃다지를 위하여』에서 시인은 주변의 자리로 옮겨 앉아 있다. 이제 시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어린 꽃다지’들로 대유되는 ‘세울이’, ‘솔이’, ‘아내’, ‘1학년 3반 중학생’들이 북적대며 들앉아 있다. 찬찬히 그들 틈새를 비집어 들면, 거기에는 ‘참새’, ‘하늘이 구름이’, ‘개구리’, ‘찌르레기’, ‘붉은머리 오목눈이’, ‘홍시’, ‘감꽃’ 들이 의인화되어 그들과 어우러져 있다. 뿐 아니다. ‘장동할배’, ‘다 익은 편지를 기다리는 동네 어른들’, ‘매표소 아주머니’, ‘노총각’, ‘평촌리 공해방지 대책위원장 이영학 씨’, ‘감물리 주민들’도 한데 북적대고 있다.『어린 꽃다지를 위하여』에서 이들 모두는 ‘어린 것’으로 비유되어 읽힌다. ‘어린 것’은 한없이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가족과 그의 제자들이라는 개인 삶터의 존재들에 대한 비유이고, 도시화로 인해 점점 망가져 가는 ‘밀양’의 자연 생태에 대한 비유이며,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에 대한 비유들이다.
가끔 날 선 목소리로 이 ‘어린 것들’을 위해 고함치던 예전의 시인은 이제 결 고른 목소리로, 그러나 묵직하게 그들을 위해 에둘러 말할 줄 안다. 시인의 이런 변화를 ‘말하기의 성숙’이라고 할지, ‘나이듦의 능청’이라고 할지는 이 시인의 시들을 꼼꼼하게 내려 읽는 독자들만이 알리라. 행여 이를 궁금해 할 독자들이 있다면 다음 작품이 그 열쇳말이 될 수 있으리라.
급하게 차를 몰아
집으로 달리는 내 앞에
몸 던져 길을 막아서는
개구리, 개구리, 개구리
그 어린 것들
엉덩짝 뒤뚱이며
도로 점거에 들어간
두꺼비, 두꺼비, 두꺼비 아줌씨들
거대한 쇠바퀴로 확 갈아버린
아, 살비린내.
그해 오월마냥 헤까닥 돌아버린
아득한 길.
-「태풍 오는 저녁-야간 운전」전문.
시인은 가끔 습관처럼 옛날 그가 앉았던 그 자리, 지금은 ‘어린 것들’의 자리인 그곳을 깜빡 잊고 지날 때가 있나보다. ‘어린 것들’를 보호하기 위해 그들에게 온전히 자리를 다 내주었다가 다시 그 자리를 찾아든 시인의 낭패를 다음의 시는 보여준다.
지난 가을 어느 저물녘 마을 앞 고개를 지나는데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마리 내 차에 치였다.
오늘 나오는 길에 떼지어 차를 가로막는 이놈들을 다시 만났다. 횡단보도도 아닌데 이쪽 개나리 덤불에서 건너편 솔밭으로 가고 있었다. 차 세우고 한참을 보니 길이었다.
오목눈이 조잘조잘 다니는 길에 내가 차를 몰고 정신없이 뛰어든 것이다.
-「길에 대하야」전문.
어린 것들에 대한 시인의 사유가 참 고맙다. 이쯤 되니 불현듯 얼마 전 밀양을 중간점으로 하여 개통된 ‘대구-부산간 고속도로’가 얼마나 많은 ‘길’들을 망가뜨렸겠는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길을 잃어버린 그 어린 것들은 또 다시 길을 만들기 위해 “제 생을 모두 걸고” 아스팔트를 온몸으로 건너고 있으리라. ‘씽-씽-’ 내달리는 “싱싱한 타이어”들을 온몸으로 박살내면서.
어린 것들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속마음은 “…… / 새들의 땅에 세 든 우리 부부 / 눈치만 자꾸 늘어가는데 / 오늘 아침에도 한참 잔소리 해대더니 / 이내 마실 나갔다”(-「새들의 집에 세 들다」일부)는 진술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2. 사라진 풍경들
마루 높은 집을 자취방으로 정했던 친구는 대학 졸업 때까지 그 집을 옮기지 않았다. 그 친구가 대도시로 나간 후로, 나의 밀양행은 점차 잦아들었다. 그러나 곰곰이 되짚어 보면 철마다 꼭 한두 번씩은 일부러라도 그곳으로의 여정을 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최근 수년 사이 밀양은 참 많이 변했다. 읍내 장터 같던 옛 풍경은 어느 새 사라져 버렸다. 세련된 간판의 옷가게들이 번듯하게 줄지어 늘어섰고, 예전의 은근했던 골목골목들은 반듯한 아스팔트 끝에 속살을 다 드러내 보이고 있다. 나직한 돌담 너머 높다란 마루가 도도하게 햇살을 되튕기던 옛 집터엔, 달랑 문만 한 짝 거리로 내놓은 ‘원룸’들이 즐비하다. 마치 거리의 여자들이 속옷차림으로 나앉은 느낌이다. 요란한 경운기 발동음이 우리들의 대화를 가로채가던 들녘에는 대도시 못지않은 고급 아파트들이 몸집을 불려 앉았다. 이 변해가는 밀양의 한복판에서 시인도 아마 옛 터가 그리운가보다.
막내야, 아빠가 너만했을 때
뒷산에서 ‘동무야’ 부르면
동구에서 ‘뭐하노’ 대답이 들리는
그런 산골에서 살았어.
산이 부르면 산으로 치오르고
내가 부르면 물가로 마냥 내달렸지.
고무신 벗어들고 들길 달려가면
고추잠자리 반갑게 이마를 치고
새털구름이 머리를 씻겨 주었어.
…(줄임)…
사람이 다니던 길은 찻길이 되고
사람이 찾지 않는 길은
산으로 숨어버렸어.
길이 사라지자 발바닥은 눈이 멀고
아빠도 승용차를 사게 되었지.
아침 먹고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가고
퇴근해 지하 주차장에서 나왔어.
-「발바닥이 하는 말」일부.
변해버린 도심지에서 ‘장동 할매’의 눈치를 보면서도 행복해 하던 ‘장동 할배’(「대목장날」)나, ‘다 익은 편지를 다룰 줄 알던 마을 어른들’(「다 익은 편지」, 그리고 ‘밭두렁 풀 베다 청승 떨떤 노총각’(「노총각」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문득,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내게 핸드폰이 있습니다.
번호만 누르면 금세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줄임)…
초고속 인터넷 연결된
컴퓨터도 있습니다.
…(줄임)…
게다가 내게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몇 시간 안에
당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제초제처럼 세상에 뿌려진 뒤
당신이 거기 없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이런 세상」
이 시는 ‘있어야 할 존재’의 부재를 말하고 있다. 이 시에 존재하는 것들(핸드폰, 컴퓨터, 자동차)이 없었던 그 때에 오히려 우리네 삶은 정겹지 않았던가!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존재하는 요즘, 정작 있어야 할 ‘당신’이 없는 요즘, 우리들은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사라져 버린 ‘당신’. 그것은 우리들의 ‘어머니’이며, 우리들의 ‘이웃’이리라. 시인이 전하는 미리벌 들녘의 이야기들을 눈으로 따라 가다 보면, ‘대목장터’에서 실실 웃어가며 물건값을 흥정하는 ‘장동 할배’가 걸어 나온다. “휘어진 허리 굳은살 익은 손끝”의 “어머니”가 내 등짝을 슬근슬근 밀어주기도 한다. 아, 그분들. 그분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온전한가? ‘사는 일에 치여서’, 또 ‘편리함을 위해서’, 그리고 ‘바빠서’라는 핑계로 그분들의 삶터를 다 헤집어 놓았으면서도, 우리들 스스로 그분들을 위해 마음 한 쪽 온전히 펼쳐 보이지 않는 이 천한 이기(利己)의 현대성이란 도대체! 나부터 반성할 일이리라.
이쯤, 문득 발바닥이 간지럽다.
…(줄임)…
평촌에서 고개 넘어 인산
초등학교 지나 동산, 둑길 따라 오산
명례, 수산으로 온종일 걸었어.
그제서야 새끼발가락이 간지럽더니
발바닥이 뭐라 뭐라 떠드는 소리가
내 몸으로 기어오르는 거야.
이내 콩닥콩닥 가슴이 뛰고
그 소리 따라 가자
냇가 자갈돌이 환하고
솔바람 소리 귀를 간질이는
아빠 고향 마을이 나오는 거야.
우리 막내야
발바닥이 전해준 비밀이야.
너만 알고 있어.
-「발바닥이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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