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
*안 도 현*
일생 동안 나무가 나무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하늘의 햇빛과 땅의 어둠을 반반씩, 많지도 적지도 않게 섞어서
자기가 살아온 꼭 그만큼만 그늘을 만드는 저 나무가 나무인 것은
그늘이라는 것을 그저 아내로 드리우기만 할 뿐
그 그늘 속에 누군가 사랑하며 떨며 울며 해찰하며 늘 다가도록 내버려둘 뿐
스스로 그늘 속에서 키스를 하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눈물을 닦거나 성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말과 침묵 사이, 혹은
소란과 고요 사이
나무는 저렇게
그냥 서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듯 보이는
저 갈매나무가 엄동설한에도 저렇게 엄하기만 하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처럼 서 있는 이유도
그늘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빈한한 집안의 지붕 끝처럼 서 잇는 저 나무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때로는 그늘의 평수가 좁아서
때로는 그늘의 두께가 얇아서
때로는 그늘의 무게가 턱없이 가벼워서
저물녘이면 어깨부터 캄캄하게 어두워지던 아버지를
나무, 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눈 내려 세상이 적막해진다 해서 나무가 그늘을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쓰러지지 않는, 어떻게든 기립 자세로 눈을 맞으려는
저 나무가
어느 아침에는 제일 먼저 몸 흔들어 훌훌 눈을 털고
땅 위에 태연히 일획을 긋는 것을 보게 되는 날이 있을 터
=============================================안도현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시선239, 2004)에서...
언제부터인가 우리시에 '아버지'의 기호가 잦아졌다.
삶이 고단하여 부양의 짐을 진 자들의 일그러진 표정들이 애처롭다.
외환위기가 닥치고, '명예퇴직'이 중년의 무능함으로 해석되어버린 시대에
우리의 아버지들은 저 '굳고 정하다는 갈매나무'의 몸태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문득, 아버지들의 어깨가 둥글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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