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태 일(시인), <국제신문>, 2005. 4. 4.
지난 해 팔월부터 여태껏 마무리 못한 시 한 편이 있다. 제목은 미리 붙여두었다. 일컬어 「옥비의 달」이다. 긴 땅콩밭 고랑이 펼쳐진 낙동강 기슭이었다. 감돌아 나가면서 퉁겨내는 햇살이 땅콩잎 푸른빛을 더욱 푸르게 밀고 당기며 따스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웃고 있었다. 건너 묏줄기들이 그윽이 강기슭 쪽으로 고개를 한 차례씩 더 낮추고 앉는 늦은 한낮이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이육사 시인 고향 마을 언덕에 세워진 이육사문학관으로 오르는 걸음이었다.
차에서 내린 뒤 한 무리 일가붙이에 섞여 그녀는 문학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옥비 여사. 한눈에 나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다짜고짜 팔을 붙잡고 강 쪽으로 돌려 세웠다. 긴 땅콩밭을 그림으로 삼은 뒤 한껏 내 욕심대로 사진기 셔터를 이리저리 눌러댔다. 갑작스런 카메라눈 앞에서 그녀는 부끄럼을 탔다. 그러면서도 예순을 넘은 나이에 아직까지 결 고운 웃음을 머금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혹 식장에 가면 볼 수 있을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왔던 터에 요행을 만난 셈이다.
그렇게 사진 몇 장이 내 손에 남았다. 이옥비. 1944년 네 살 때 아버지 이육사를 중국 북경감옥에서 여윈 아이. 육사의 유일한 직계 혈족이다. 2004년 지난 해 7월 31일 이육사탄신백주년 기념행사 가운데 하나로 제1회 이육사시문학상 시상식과 이육사문학관 개관식이 있었다. 예술문화 기획이 나라 곳곳에서 봄풀 돋듯 마련되는 가운데서도 육사에 대한 세상 대접이 마땅찮아 보였던 터였다. 안동시청의 시문학상 시상식을 본 뒤 바로 문학관 개관식이 있을 원천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1904년 4월 4일(음력)에 태어난 육사가 서른일곱에 낳은 외딸이 여사다. 어느 신문과 한 대담 기사 속이었다. 육사가 늦게 자녀를 보게 된 일을 묻는 기자의 물음에 "아버지가 열여덟, 어머니가 열여섯에 결혼하셨고 저를 늦게 낳았어요. 두 분이 당최 만나지를 못했으니까요"라며 밝게 웃던 그녀다. 왜로 경찰에 의해 저질러진 열일곱 번에 걸친 투옥과 고문이 아로새겨진 육사가 아닌가. 그 곤고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육사는 감시를 피해 이저리 요양 아닌 요양을 떠돌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고 난 다음 헤어지면서 어디 사시느냐고 짧게 물었다. 일본 신사(니가타)에 있다는 답이 왔다. 뜻밖이다. 앞뒤 사정을 물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놓치듯 그 말을 귀에 담은 뒤 여사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굽이진 인연이 그녀를 남의 나라, 그것도 어린 날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 머물게 했을까. 아버지 형제 여섯 가운데서 일찍이 옥사한 아버지에 둘은 광복기에 월북하고 한 분은 전쟁 속에 소식이 끊긴 집안의 딸이 그녀다.
어린 옥비가 겪었을 곤경은 쉬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석연치 않다. 독도 너머 먼 저쪽 남의 나라, 겨울에는 눈이 눈물처럼 쑥쑥 빠질 것 같은 곳이 신사다. 재일 교포 북송으로 한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만경봉호가 오가는 동해 쪽 항구 도시. 조금만 애쓰면 이옥비 여사가 일본에 머물게 된 까닭은 쉬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그 일을 그냥 놓아두고 있다. 기억에도 가물거릴 아버지의 무게를 어린 옥비는 어떤 방식으로 이고 지며 살아왔던 것일까.
이육사탄신백주년 행사장에서 여사를 짧게 만나고 돌아온 뒤부터 나는 시 「옥비의 달」을 매만지고 있다. 마무리하기 힘들지 모른다. 그럼에도 틈틈이 내 속에서는 옥비의 달이 뜬다. 마음 또한 어김없이 함께 달뜬다. 그 달 속을 울며 걷는 한 아이가 있다. 기름질 옥(沃), 아닐 비(非). 간디 같이 욕심 없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아버지 육사가 붙였다는 이름이다. 아버지를 여윈 네 살배기 옥비. 어느새 예순을 지나 칠십을 넘겨다보는 한 여자가 세상의 동쪽 능선 위에 고요히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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