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삶 한 쪽을 엿보다...>
-백석이 사랑한 여인, 백석을 사랑한 여인
오랜 세월 이념의 붉은 줄에 갇혀 그 존재조차 확인될 수 없었던 이가 한둘이었던가. 그 중에서도 수십 년 세월, 붉은 창살에 갇혀 미미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나버린 이땅의 숱한 시인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현재형으로 존재하는 이 붉은 담벼락이 새삼 공포스럽게 여겨진다. 그나마 80년대 말, 독재 권력의 선심용 해금이긴 했지만 그 붉은 담 이쪽으로 넘어온 몇몇 해금 시인들이 있어 위안으로 삼을 만하다. 그 가운데 가장 우뚝한 이름이 '백석'이다. 문단에 알려진 시인 가운데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이름을 드러낸 이가 또 있을까. 곱씹어보아도 언뜻 비할 만한 이름이 없다. 평북의 구수한 토속어와 시골 살림의 팍팍한 모양새들이 한눈에 밑그림처럼 그려지는 그의 시는 단순히 서정의 세계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소소한 이야깃거리도 풀어놓고 있다. 그의 시가 재미있기도 하면서 가슴 한쪽이 우직끈, 하는 것은 그런 풍경의 결과이리라.
그 가운데 '통영'과 관련된 몇 편의 시는 백석의 삶 한 쪽을 온전히 드러내주고 있어 여물게 읽고 싶다. 그럴 때마다 스물 몇의 나이에 사랑에 빠진 '백석'의 애태움에 덩달아 내 가슴 한 쪽이 아려온다.
#-1 백석이 사랑한 여인 : 박경련(1917~ ?)
'박경련'은 통영시 도남동에서 박성숙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통영보통학교를 마친 뒤에는 서울로 올라가 외숙부 서상호의 집에 머물며 이화고녀를 다녔다. 이 때 통영에서 가르침을 받은 바 있는 신순정의 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신순정은 백석의 절친한 친구이자 뒷날 박경련의 남편이 되는 신현중의 누나였다. 신현중은 자연스레 박경련과 가까워졌지만 신현중에게는 이미 약혼한 사람이 있던 터였다.
1935년 6월. 소설가이자 백석, 신현중의 친구였던 허준의 혼인 기념 축하 모임에서 신현중, 백석, 박경련 등이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고, 백석은 이 때 박경련에게 눈길을 두었다. 백석이 처음 통영에 걸음을 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얼마 안 된 일이고, 그 때의 통영행을 시로 옮긴 것이 다음의 시다.
옛날엔 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港口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客主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울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統營>
“저문 六月”의 통영 첫 걸음에 겪었던 생생한 감각과 포근한 느낌이 잘 묘사된 작품이다. 이 때 백석이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던 “千姬의 하나”가 바로 ‘박경련’이었을 것이다. 이 때 백석의 나이 스물 넷, 박경련의 나이는 꽃다운 열여덟이었다.
백석의 두 번째 통영 길은 그 이듬해인 1936년 1월 초순의 일이었다. 방학을 맞아 통영으로 내려가 있던 박경련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서울에서, 대구로, 다시 삼랑진을 거쳐 마산에 이른 뒤 배를 타고 통영으로 가야만 했던 그 기나긴 길은 맘 속 깊이 아로 새긴 그리움만큼이나 아득했으리라. 그러나 방학 끝자락이었던 때라 이미 박경련은 서울로 올라가버린 뒤였고, 어긋나버린 길 끝자락에서 백석은 그저 손방아만 찧다 돌아서야 했다.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내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장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 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
한다
-<統營>
“명정골에 산다는 난이라는 이”,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으며 생각했다는 그이”. 백석이 그리도 사무치게 그리워한 박경련은 바로 명정골 여인이다.
백석의 세 번째 통영길은 막막한 그리움을 청산하기 위한 길이었다. ‘갓 쓰고, 술 받아들고, 댕기 한 감 끊’어 간 걸로 봐선 청혼의 분위기가 물씬 묻어 있다.
통영장 낫대 들었다
갓 한 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댕기 한 감 끊고 술 한 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統營-남행시초2>
박경련은 이화고녀를 졸업한 뒤 통영집에 내려와 있었다. 백석은 그녀에 대한 오랜 연정을 그대로 흘려버릴 수 없다고 여겨 그 먼 길을 다시 걸어 내렸다. 열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다시 배를 타고 들어야 했던 통영. 그 먼 길을 달려오던 백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오붓한 가정을 꾸리고 살 생각이 아마도 그의 지친 여정을 위로해 주었으리라. 그리하여 대낮에 맞춰 ‘통영장’에 들러 갓도 갖춰 쓰고, 어른 드릴 건시도 한 접시 사고, 그녀를 위해선 홍공단 댕기 한 감 끊었으리라. 그러나 박경련의 집안은 대대로 민족지사의 기질을 지닌 집안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나약하기 짝이 없는 시인이자, 영어 교사로 있었던 백석은 애당초 사윗감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다. 다시 먼 길을 걸어올라야 했을 백석의 맘 속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 북받쳐 올랐으리라.
그러나 정작 백석을 슬픔에 빠뜨린 건 그 몇 달 뒤의 일이다.
1937년 4월. 백석의 친구이자, 박경련을 백석에게 소개해주었던 신현중이 그의 약혼녀와 파혼하고, 백석의 맘 속 연인 박경련과 혼인을 해버린 것이다. 이후 백석은 그 복잡하고 애잔한 그리움을 시 네 편에 갈무리하는 것으로써 애끊는 사랑을 마친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바다> 일부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일부
이 길이다
얼마 가서 감로(甘露)같은 물이 솟는 마을 하이야 회담벽에 옛적본의
쟁반시계를 걸어 놓은 집 홀어미와 사는 물새같은 외딸의 혼삿말이 아지랑이 같이 낀 곳은
-<南向> 일부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흰 바람벽이 있어> 일부
#-2. 백석을 사랑한 여인 : 김자야(본명 김영한, 1916~1999)
백석의 삶에 얽힌 또 한 여인이다. 백석의 시에 간간이 '자야'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세간에선 한 때 '자야부인'으로 되뇌이던 이름이기도 하다.
'자야'는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1932년 김수정의 도움으로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한국 정약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면회 차 귀국하여 함흥에 일시 머물렀다. 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백석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38년 백석이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의했으나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찡으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했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바 있고, 1990년 스승 하규일의 일대기와 가곡 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출간했다. 97년 2억원을 문단에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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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이라는 이름은 참 짧은 시간에 제도 교육 안에 자리잡았다. 백석이 이념의 붉은 줄에서 해방된 게 88년이니 불과 20여년 만이다. 민족 시인으로 자리잡은 김소월에 대한 연구가 지금껏 60여년 넘어 쌓인 것을 생각하면, 백석의 남한 터잡기는 성공적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것으로 그치지 않고, 수능 10년을 통째로 뒤흔든 '복수정답 인정'의 파문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북적대는 통영길...예사로 오르내린 그 길을 수십 년 전 백석이 오르내렸다 생각하니, 다시금 그 길이 선하게 밟힌다. 그의 발자국마다 묻어 있을 알싸한 그리움을 생각하니 '통영'이라는 이름이 새삼스럽다.
'통영', '충무'......처음 그 이름의 유래를 들었을 땐, '충무공을 존경했다는 한 독재자'의 취향이 이 나라 도시의 이름까지 지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분개했었다. 십수 년 전, 시군행정통합정책에 맞춰, 늦은 일이었지만 민초들의 뜻으로 다시 본디 이름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충무시'라는 이름을 그대로 뒀더라면, 백석이 오르내린 '통영길'은 참 어색하지 않았을까? 이 알싸한 그리움의 길이 '독재자'가 붙여진 이름에 가리는 일은 생각만으로 짜증스러웠으리라.
여름이 아니더라도, 불쑥 어느 날, 열사흘 달빛이 밝힌 그 길을 나도 걸어내리고 싶은 날이 있다.
백석의 <통영> 관련 자료는 아래의 책에서 도움받았습니다.
-박태일, <한국 근대문학의 실증과 방법>(소명출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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