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

<사랑(愛)이라는 짐승-산해경2>(한승원)

naru4u 2007. 8. 27. 17:43

<사랑(愛)이라는 짐승>
                --[산해경] 2

                                                                    *한 승 원*


사람꽃 지천으로 핀 그 땅에 사랑이라는 짐승이 살고 있다
눈에 보이기도 하고 혹 보이지 않기도 한 그 짐승은 눈을 치뜨는 법이 없고 내리뜨기만 한다 그 짐승한테 한 번 물리면 속으로 피멍이 드는 골병으로 평생 골골거리게 된다 잡아서 약에 쓰면 백년 넘게 장수한다 단 체질이 맞지 않는 자는 요절을 하게 된다 그 짐승은 반드시 격정적일 때 신음하듯이 울곤 하는데 그 울음 소리는 '옴'으로 시작되고 '훔'으로 끝이 난다* 옴은 겨자씨 한 알이나 터럭 한 오라기처럼 시작이고 훔은 아홉 마리의 소를 다 잡아먹는 소리인데 한 송이의 꽃일 리 없는 무섭고 더러운 짐승인 나 날마다 밤마다 그 꽃밭에서 뒹굴며 그 짐승한테 물리고 싶다.

 

                                          *옴마니반메훔 : 밀교의 주문이다. 나는 그것을 '연꽃살과 보석의 뜨거운 만남 같은 환희여 열반이여!'의 뜻으로 풀고 싶다....


====================================================한승원,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문학과지성사, 1995

'한승원'. 내 기억 아득한 저 편에 그의 이름을 처음 익히던 때가 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라는 소설...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대입을 한 달여 앞두고서도 소설책이며, 시집을 잔뜩 넣어다니던 내가 걱정스러우셨던 아버지는 내 방에 있던 소설책과 시집들을 싸그리 묶어 어느 날 다락으로 올리셨다. 그 '분서갱유'(그 때 나는 감히 그렇게 표현했었다)의 난을 면한 책 한 권이 <아제아제 바라아제>였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든 척 하며 갓등 하나로 밤새 읽어내렸던 책이었다. 그 안에 빼곡하던 크고 작은 사랑들이 열 아홉 살 까까머리 고등학생에게 사랑을 가르쳤다.
그 얼마 뒤, 그가 시집을 들고 나왔다. 남들이 다 돈 안 된다던 시집을. 그 돈 안 되는 시집 안에는 온통 '상처'가 응어리져 있다. 모두 '사랑'이라는 짐승한테 물린 자국이다. 군데군데 딱지 앉은 그 상처...그러나 흉하지 않다. 그게 사랑이다.

전남 장흥 어느 물가에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호수 쪽으로 내놓고 산다는 그를 만나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