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

<구두 닦는 소년>(정호승)

naru4u 2007. 8. 22. 16:26

<구두 닦는 소년>

                                    *정 호 승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 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하루 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짓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담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담는다.

이 세상 별빛 한손에 모아

어머니 아침마다 거울을 닦듯

구두 닦는 사람들 목숨 닦는다.

목숨 위에 내려앉은 먼지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메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별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정호승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창작과비평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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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구두를 꺼내 신었다. 폭염이 시작되면서부터 외면해두었던 구두...

신발장 선반에 올려둔 구두에 어느 새 뿌연 먼지들이 내려앉았다.

구두를 닦다가 불현듯, <구두 닦는 소년>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구두를 닦으며 맘을 설레던 기억 한 자락 건져 올린다.

아버지의 출근길, 성근 솜씨로 쓱싹쓱싹 구두를 닦아두면

아버지는 은전 한 닢을 기분좋게 손에 쥐어주시곤 집을 나서셨다.

백원 짜리 은전 한 닢에 하루가 흥겨워지던 때였다.

동네 가게 앞 아이스통에 머리를 처박고, 50원 짜리 '아맛나'를 찾아 헤매던 기억...그러고도 50원이 남는다.

잘 사는 이웃집 아이 때문에 마음이라도 다치는 날엔, 보란 듯이 '부라보콘'을 핥아먹으며 일부러 그 집 앞을 서성대기도 했다.

입 언저리 끈적이며 '맛동산' 봉지를 가슴에 품고 온 골목을 휘젓고,

아이들의 부러운 눈길 앞에 무슨 '성은(聖恩)'이라도 베풀 듯 그 봉투를 열었다 닫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고, 치졸한 자기과시였지만 소년 시절의 내겐 그게 행복의 전부였다.

꿈...빵집 여자에게 장가 가서 평생 좋아하는 빵을 먹고 살리라는...

꿈...산비탈 골목골목을 신기하게 단번에 찾아가는 택시 기사들을 부러워하며 나도 커서 꼭 택시 기사가 되리라던...

꿈...

그러나 정작 내 삶은 서른 해가 넘도록 지지리도 궁상맞은 길만을 헤매고 다녔다.

적어도 배고픔은 면할 수 있는 '빵집 사위'가 되는  길을 '택시 기사'처럼 단번에 찾아가지 못한 채,

퀴퀴한 책들에 파묻혀서 "푸른 별을 바라보며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들길에 서서-신석정>)라는 시구를 위안 삼아

나도 그 정갈한 시인들의 삶을 배우는 거라 되뇌었다.

그렇게 십수 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정갈한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그런 내게 '생활이 슬픈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을 깨닫고 난 뒤, 난 수십 년 가슴에 품은 꿈을 지웠다. 내가 올려다 보던 '푸른 별'은 순식간에 별똥별이 되어 추락했고,

이젠 내 가슴 안 어느 한 켠에 서글픈 화석이 되어버렸다.

'빵집'이 예전처럼 그렇게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업종이 아니라는 것과,

위성을 이용한 내비게이션 하나면 초보들도 대한민국 구석구석 골목길을 다 누비고 다닐 수 있는 세상이 돼버렸다는 것...

'책 속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