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

아내 하나, 남편 둘, 이건 도대체...<아내가 결혼했다>

naru4u 2008. 11. 29. 03:19

 <아내가 결혼했다>(박현욱 / 문이당, 2006)

 

 참 발칙한 상상이다. '아내가 결혼했다니'. "만약 내 아내가 그랬다면?"...상상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쿵, 한다. 그러나 나는 책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처음엔 장면 장면에 마침표처럼 찍힌 '축구이야기'를 읽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내'와 '남편들'의 이야기에 휩쓸려버렸다. 그리고 애초의 '발칙함'에 대한 반감은 생각하기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남성의 삶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두 여자 거느리기'가 능력으로 인정되어 온 인류사. 그건 단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다시 '아내가 결혼했다'는 제목에 눈길을 둔다. 발칙하지 않다. 편협한 남성의 각막만 걷어낸다면, 그저 보편적 자유연애에 대한 로망일 뿐이다. 이제 나는 이 '남편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대체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이기에 저토록 '반쪽'만이라도 가지고 싶어할까? "

 

책장을 넘기는 내내 내 머릿속엔 '아내'에 대한 상상이 부풀어 오른다. 백설공주, 엄지공주, 잠 자는 숲속의 공주, 인어공주, 콩쥐, 심청, 춘향 등, 유년기 서사의 주인공들이 죄다 되살아났고, 아랫도리 뻐근하게 했던 내 10대의 성인 잡지 속 이름 모를 그녀들과 야동 속의 그녀들도 되살아났다. 잊고 있었던 20대의 내 연인들은 얼굴을 가린 채, 목소리로, 발걸음으로, 옷맵시로 상상속의 '아내'를 채워주었다. 내 상상 속 '아내'의 핸드백은 30대의 어느 봄날, 맞선 자리에 나앉았던 어느 여자의 것이었고, 그녀의 구두는 어느 화사한 봄날 아침, 출근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긴 줄 끝에 번뜩이던 것이었다.

 

내 상상 속 '아내'......

이 정도로는 다른 남자와 공유할 만큼 매력적일 수는 없다. 다시 그녀를 불러세우자.

고개 돌리는 그녀의 목덜미 쯤에서 단발머리가 찰랑댄다. 머리칼 찰랑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엘리자베스 아덴-그린티'가 아슴하게 번져난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가늘고 긴 손가락 끝엔 선홍빛 매니큐어가 수줍은 뺨을 닮았다. 살짝, 입술을 들어 웃어보이는 순간, 속살 내비치듯 덧니가 살짝 비쳤다 사라진다.

집안 일을 거들지 않은 채, 휴일이면 뒹굴뒹굴 낮잠과 TV시청으로 온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아내는 콧노래 흥얼대며 청소기를 돌리고, 스팀청소를 하고, 그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희디 흰 빨래를 햇살 아래 널고 있다. 나는 오후 내내 잠결에 빠져 있다가 해질 무렵 알싸한 카레 냄새에 잠을 깨 씻지도 않은 얼굴로 식탁에 가 앉는다. 아내는 그런 내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곤 역시 즐거운 표정으로 내 앞으로 음식들을 날라온다.

 

그리고 드디어 밤이 되면......

희뿌윰한 새벽녘 그녀의 잔등이 달빛 아래 부드럽다. 나는 그녀의 잔등을 집게 손가락으로 쓸어가며 새삼 사람의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에 대해 감탄한다.

......

이제 그녀를 세상에 내놓아도 좋겠다. 그리하여 그녀가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고 싶다고 말해온다면, 나는 잠시 망설이는 척 한 뒤, 못이기는 체 아내의 결혼에 동의를 해주리라. 아예 남의 사람으로 내보내 그녀의 손끝 하나 만질 수 없는 일보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하는 편이 행복하겠다 여기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아내라면......기꺼이......나는 아내의 결혼을 참으리라.

 

최근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손예진'이 '아내'의 역할을 맡았나보다. 사람들마다 그 영화에서  "손예진이 참 예쁘다"라고 했다. 그러나 손예진은 내 '아내' 만큼은 아니다. 내가 이 영화를 보지 못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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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생각>

적어도 이 소설에서만큼은 박현욱의 문장이 그다지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별다른 꾸밈없이 간결한 문장으로 장면장면을 고민없이 넘겨보게 하는 것도 작가의 재주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기준에서의 '작가다움'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세계문학> 당선작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심사위원들은 분명 명망 높은 기성작가들이었을텐데 말이다. 이제 문학도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에 이르렀나보다. 존재의 진지함이나, 인물의 내면 성찰, 혹은 사람살이의 내밀한 고백, 혹은 낮은 생들의 몸부림 따위는 돈이 되지 않는 시대이고보니, 새삼 생이 무거운 작가들이 걱정스럽다. 그럼에도 그들만큼은 그 묵직한 문장들을 내려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가 결혼했다>와 같은 소설은 돈을 만들지 작가를 만들진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