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그만둔 지 꼬박 한 달...
십수 년, 야행성에 길들여진 몸을 하루아침에 아침형으로 바꾸는 게 무엇보다 힘든 일이라 여겼지만,
정작 그보다 더 힘든 일이 '주부의 일상'임을 몸소 깨닫는 요즘이다.
아침 7시 30분.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하느라 실눈을 뜨고 겨우 꼼지락댄다.
(아침밥은 아직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행히 우유 한 잔에 빵쪼가리 뜯어먹고도 불평없이 '돈 벌러 가주는' 아내가 고맙다.ㅎㅎ.
8시...큰놈(아들), 작은놈(딸)이 꼼지락대며 이리저리 뒹굴댄다.
이것들도 이제 일어날 때가 된 거지.
얘네들이 꼼지락대는 동안 부랴부랴 정신을 차려 아침밥상을 차려야 한다.
(그래봤자 서툰 솜씨로 차려내는 식탁은 소박하다 못해 정갈하기까지 하지만.)
'하하볼', '방귀대장 뿡뿡이', '뽀로로' 등의 아침 유아 프로로 애들의 시선을 유도한 다음,
옆에서 시중 들 듯, 밥숟갈을 번갈아 들이대 겨우 한 끼를 먹인다.
(울엄마 생전에 병수발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데, 아주 이것들은 상전이다.) 끙!
큰놈, 작은놈, 번갈아 씻기고 옷 입히고 나면 어린이집 차량 올 시간이 빠듯하다.
밥 먹고 기운 차린 놈들은 잽싸게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고, 달래고 윽박지르기를 반복해가며 뒤쫓다보면 어느 새 차량 도착 시간 5분 전!
이쯤되면 거의 강력계 형사 수준이 된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작은 놈을 양다리로 누른 채 머리칼을 되는 대로 한움큼 쥐어 고무줄로 대충 묶고 나면, 전쟁은 막바지에 치닫는다.
차례대로 신발을 신기다 보면 이 신발 골랐다가, 또 다른 것 신겠다고 벗어던지고, 또 신기고...우이쒸~
내 새끼지만 참 너무하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작, 난 세수도 못한 채, 주섬주섬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가면 온 동네 아줌마들이 애기들을 태워보내느라 부산스럽다.
엘레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부스스한 머리칼에 대충 차려입은 운동복...TV에서 보이는 영락없는 백수의 모습이다.
어떤 날엔 백수가 아니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 정장을 입고 나간 날도 있었는데...
하아~넘 힘들었다.ㅠㅠ.
우쨌든...
그렇게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설겆이거리가 또 한뭉태기!
널려진 이불에 옷가지들 정리한 뒤, 청소기로 대충 훑고 나면 열시 반.
빨래 돌리는 동안, 책 좀 보려고 앉으면 급피로감.
분명 책을 펴놓고 앉았는데, 머릿속엔 책 내용은 전혀 냉무! 꿈 내용만 아삼삼할 뿐이다.
잠을 깨려고 TV앞에 앉아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미국드라마 <NCIS>를 보다보면, 금세 까무룩, 잠에 빠지고 만다.
책은 커녕 드라마 한 편 보기 힘들다. 투덜!
늦은 점심 한 끼 먹고, 잠깐 앉았다보면 이젠 또 애들이 올 시간이다.
그넘들 오기 전에 부랴부랴 저녁 준비하느라, 찌개 끓이고 생선 토막이라도 구울라치면,
어설픈 살림 솜씨에 어찌 그리 널려지는 세간들은 많은지...
한 끼 먹을라치면 치우는 게 더 많은 게 요즈음 내 살림실력이다.
애비 속도 모르고, 해맑은 표정으로 배꼽에 손 모으고, "다녀왔습니다~"를 외쳐대는 것들을 보노라면,
마치 그 또롱또롱한 목소리가 남은 저녁의 선전포고와도 같이 느껴진다.
그렇게 시작된 저녁 전쟁은 6시, 7시, 8시, 9시, 10시까지 쉴새없이 이어진다.
역시 협박과 달램의 반복 끝에 치닿는 수면으로의 여정은 매일 밤 길고 지리하기 짝이 없다.
조금도 보탬이 없이 처음 며칠 동안은 서너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거실과 주방과 애들방을 드나들어야 했다.
그 동안 내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저 막연하게조차도 생각해보지 못한 시간들을 뼈저리게 반성하는 요즘이다.
직장일이 힘들다는 핑계로, 또는 매일 밤 늦게 온다는 핑계로,
살림과 육아를 외면해 왔던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던가를 새삼 깨닫는다.
아울러, 그토록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주부 대학원생들에 대해 이젠 좀더 관대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저 살 만하니까, 교양으로 '석/박사' 과정을 다니는게지...
돈이 남아도나보네...공부나 좀 제대로 하지...등등의 눈흘김이 얼마나 가당찮은 것이었나를, 또한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
젖은 눈..아니아니...젖은 손으로 두 주먹 불끈, 쥐고 외쳐본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이여, 파이팅!
(덩달아 나도 파이팅!)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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