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 떠돌기...

<천은사> 숨은 물소리를 찾아서...

naru4u 2015. 4. 21. 20:09

# 천은사, 숨은 물소리 찾아가는 길...

한 해의 절반이 지나던 어느 날이었던가봅니다. 돌아보면 벌써부터 후회스럽기만하던 일상. 그 속상함을 떨치려 오래 묵혀 두었던 그리움 하나 찾아 나섭니다.

'천은사'. 그 곳은 무척 오래된 그리움이었습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목덜미로 확- 밀려오르던 그 서늘함이 벌써 7. 오래도록 묵혀두었던 그 그리움을 이제서야 찾아보기로 맘먹었습니다.

'샘이 숨어 있다는 절'. 천은사(泉隱寺)는 그런 뜻이겠지요. 절 어디에 그 서늘한 물줄기를 숨기고 있을까 싶어 가는 길 내내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비구름 가득한 하늘 탓인지 남해고속도로는 뜸했습니다. 하동에서 구례로 향하는 길 왼편으로는 섬진강이 속도계 바늘따라 빨라졌다 느려졌다 했지요. 불어난 강물에도 재첩 캐는 아낙들의 물질은 싱그러워 보였고, 십리에 뻗어진 연초록의 벚꽃나뭇잎들에선 물비린내가 물컹, 베어졌습니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낯익은 이름 하나 '흥룡마을'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온 황해도 연백의 어느 종갓집 맏며느리였다는 이씨(李氏) 할머니... 십수 년 전 옛문헌답삿길에 만난 그 할머니의 동네. 제법 실한 개울가에 초라한 움막 하나  기울이고 사시던 이씨 할머니. 옛 아녀자의 몸으로 소학(小學)까지 뗐다던 그 할머니는 아직도 살아 계신지 궁금키도 했고, 손자같은 학생에게 손때 묻은 옛 서책을 선뜻 꺼내주셨던 그 빛 닳은 고리짝 손잡이도 그대로인지...

흥룡마을을 지나면 곧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평사리' 앞을 지나게 됩니다. 10여년 전, 평사리 그 탱자나무 울 안에 서서 '월선이''용이'의 그 애틋하면서도 처연했던 마음들을 떠올렸던 기억...문득, 그 탱자나무 숲과 마을 뒤 무성하던 대숲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천은사를 제대로 보려거든 쌍계사를 지나치고, 연곡사도 지나치고, 남한의 절집들 가운데 웅장하기로 소문난 화엄사 각황전도 그냥 지나쳐야만 합니다.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내달아 이른 절집 '천은사'. 그곳은 노고단 오르는 길 한 켠 숲에 치렁치렁한 물소리를 숨겨두고, 그 바깥채에는 빛 닳은 일주문을 세워 두었는데, 그것은 ''''의 구분이 흐트러져 오래된 절집 단청의 수긋함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조급한 여행객의 갈증을 은근한 물소리로 먼저 달래던 그 절집의 운치란 여느 절집과는 다른 일주문의 처마...어깨를 잔뜩 치떠올린 본새가 이제 막 비상을 하려는 수리의 움츠린 어깻살 같기도 하고...

            

일주문을 지나 '수홍루'에 이르면 입구에서 들리던 그 은근한 물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빗물에 불어난 계곡물이 수홍루를 떠받친 석교(石橋) 아래로 처참히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그 요란함은 미리 일주문에서 갈증을 풀지 못했다면 참으로 감당키 힘든 것이었습니다. 수홍루 아래를 지나면 사천왕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물이끼에 젖어 있습니다. 그 계단을 반쯤 올라간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사천왕문 저편 오르막에 단청빛이 선명한 범종각이 우뚝합니다. 빛 바랜 사천왕문과 그 안 절마당 한 켠에 부려진 범종각은 천은사 중건사(重建史)를 고려해 보면 약 200여년의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200여년의 세월이 씻어 내린 단청. 사천왕문과 범종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 계단 중간 자리쯤에선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두어 번 되뇌이며, 속세에서의 흩어진 마음을 모아 쥐고 200년 저쪽으로 내달아 보는 일도 재밌을 것 같지요?

 

이렇게 천은사를 다녀왔습니다. 7년의 시간동안 맘 속에 갈무리 해 두었던 절집 이제 곧 사월 초파일이면, 일년 내내 시장에 푸성귀 내다 판 돈으로 등 하나 내걸겠다고 절을 찾는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이 무수히 이 숨은 물소리를 찰박거리며 건널테지요. 그 소박한 불심(佛心)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사는 일에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