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물결 위에 띄운 편지>
-서포 김만중을 생각하며
천 리 물길 끝나는 곳에 뱃길은 다시 시오 리. 300여 년 전 당신이 걸어 내린 길입니다. 囚人(수인)의 몸으로 수레에 실려 온 천릿길에 다시 더해진 뱃길 시오 리는, 일찍이 임진난에 충무공이 왜구들을 귀신밥으로 삼아냈던 길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남해를 건너는 뱃전에 기대 앉아 난중의 영웅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어쩌면, ‘장부가 세상에 나서 문장을 높이거나 나라에 공을 세우고, 그로 인해 부모의 이름을 천하에 빛내는 것’을 효의 최고로 알았던 때에, 죄인의 몸이 되어 그 어미의 생을 욕보이게 한 죄책감으로 내내 눈자위만 붉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한 아들은 ‘죽음’으로 먼저 보내고, 또 한 아들은 천 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야 했던 당신 어머니(윤부인)는 눈자위뿐 아니라, 속가슴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겠지요. 아마도 당신 어머니는 수년 전 당신이 지어다 바친 <구운몽>을 더듬으며 ‘세상사 허망한 것임’을 주문처럼 되뇌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난중(병자호란)에 피난 가던 뱃전에서 처음 세상 빛을 보았다는, 당신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새삼 당신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을 세상 인심들의 손가락질을 생각해 봅니다. ‘유복자’, ‘아비 없는 자식’……. 친정살이를 하면서도 ‘한 손에 미음을 들고, 또 다른 손엔 회초리’를 들고 당신을 키웠다는 당신 어머니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하려고 또 얼마나 많은 밤들을 옷고름 잘근 깨물며 속울음을 울었을까요.
그 먼 땅,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떨어져서도 ‘장씨’ 성 아녀자에 빠진 임금의 그릇된 정사(政事)를 글로 옮겨 세상 사람들을 깨치고자 하였다지요. 300여년이 지난 지금, 남해 유배지에서 당신이 남기신 <사씨남정기>는 이 나라의 젊은 청소년들이 더 큰 공부를 하기 위해 밑줄을 그어가며 배워야 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릇된 왕사가 바로잡히는 것을 당신은 비록 살아서 보지 못했다지만, 당신이 쓰신 <사씨남정기>에는 이미 그 바로잡힌 결말이 옮겨져 있어, 새삼 앞날을 염려하는 당신의 혜안(慧眼)에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그렇게 남해에서의 4년. 끝내 당신은 시오 리 바닷길에 남긴 발자국을 거두어 가지 못한 채, 절해고도의 가시울타리 안에서 마지막 숨을 놓았다 했습니다. 아비도 없는 세상에 그렇게 나신 당신은, 마지막 가는 길 또한 피붙이 하나 지키지 않는 외로운 길을 가셨다 했습니다.
찰박찰박…….
오늘 저는 당신이 건넜을 그 물길을 헤집어 수백 년 동안, 물 아래 잠겨 있던 당신의 발자국 몇 개를 건져 올립니다. 어떤 것은 물집이 잡히고 또 어떤 것은 굳은살이 박혀 있어, 쉰을 넘긴 천 리 유형의 길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지 능히 짐작할 만합니다. 당신이 거두지 못한 그 발자국 몇 개를 마음에 품고 늦은 밤, 잠을 청합니다. 내 꿈 안에서 당신의 발자국들은 물집을 털고, 혹은 굳은살을 벗고 살아나 어떤 것은 노도가 되고, 또 어떤 것은 조도가 되었습니다. 300여 년 전, 당신이 물 속에 담근 발자국들이 오늘밤 그렇게 낱낱이 살아나선, 남해를 두르고 있다는 예순 여덟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되어가는 꿈을 꿉니다. 그렇게 나는 오늘 당신을 만나는 한바탕 긴 꿈을 꾸었습니다.
===================================================================
<남해 가는 길>
ㅡ 유배시첩 1
* 고두현(시인)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花田)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九雲夢)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앵강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만년에 유배 살던 남해 노도(櫓島) 앞바다 이름이다
'시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가락 끝마디 그 까슬함 같은 그리움... (0) | 2009.10.21 |
---|---|
<어머니1>(반칠환) (0) | 2009.09.10 |
김강태님의 시, <돌아오는 길> (0) | 2009.08.12 |
[시]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문태준) (0) | 2009.04.21 |
<남한산성>(학고재, 2007)에 들다 (0) | 2009.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