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아련한 그리움으로 되새겨지는 이름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인들은 저마다의 고향을 그들의 예술품 안에 구현해 내었다. 어린 날의 순수와 성장기의 방황이 뒤섞여 저마다의 '자아'가 형성되는 곳. 그래서 고향은 평생을 두고 그리워하고, 죽기 전에, 혹은 죽어서라도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기억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요며칠 스스로 혼란스러운 일상을 치러내는 중이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이를 기르는 일에 제대로 된 확신 하나 갖지 못하고, 혼자 마음을 끓이는 날들이 이어진다.
문득, 아득한 내 기억 어딘가...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의 그늘이 그리워졌던 것은 왜일까...
<남항초등학교>
꽤 오래된 학교인데도 그다지 낡은 느낌이 덜하다. 내가 다닐 땐 시커먼 합판을 덧댄 푸세식(?) 화장실이 건물 뒤편에 있었는데...남학생, 여학생들이 서로 등 돌린 채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던 화장실...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그 기억도 어느 새 어릴 때의 추억 한 켠으로 자리잡았다.
아주 잠깐 다닌 학교였지만, 내겐 뜻깊은 곳이다. 한 학년이 600여명이나 되던 대규모 학교였고, 그 속에서 난 제법 공부를 하는 축에 끼었고, 가난했지만 온 가족들이 한데 모여 살았던 얼마 안 되는 시간들이었다.
아버지는 엄했지만, 가끔 아버지 쉬시는 날이면 나를 무릎에 앉히시곤, 햇살 환하게 되비치는 남항 바다를 영도다리 위로 건너곤 했다.
<절영로>...'꼬막계단'
이름도 몰랐던 이 길이 절영로임을 오늘에야 알았다. 그때엔 아마 다른 이름이었으리라. 그옛날, 어린 내겐 그냥 '집 가는 길'이었다. 교문을 나와 그대로 바다쪽으로 내려가면 길게 이어진 방파제를 따라 바다와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가끔은 키보다 높았던 방파제에서 기어내려 갯바위를 들추며 성게를 돌로 찧어 먹기도 했었다. 그 바닷길로 내려서는 계단이 그때도 있었던가...'꼬막계단'이라는 저 위태로운 저 계단길에 흰머리 성성한 노인 한 분이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멀리, 쉬어가는 배들이 쉼표처럼 바다에 여럿 떠 있는 날이다.
<흰여울마을> ...
감천문화마을의 흥행 이후로 변두리 골목길 곳곳이 관광상품화 되어 가고 있다. 이곳도 점점 감천마을의 분위기가 스멀스멀 배어들기 시작했다. 아직은 상품으로서의 몸집을 불리지 못해 옛살림 그대로인 집들이 많지만, 평일에도 좁은 골목길을 줄지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노라니 곧 휘황찬란한 상업 자본들이 밀물처럼 덮여올 것만 같은 예감에 아찔해진다.
그랬다...그땐...집집마다 저런 사다리 하나씩이 담벼락에 붙어 있곤 했다. 저 사다리 위에는 장독대도 있고, 햇볕에 널어 말리던 쌀알들, 모자란 마당에 다 널지 못한 빨래들이 날리곤 했었다...그땐 그랬다.
영화 <변호인>의 배경
<변호인>을 여기서 찍었던가...그러고보니 부산을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들에서 이 비슷한 장면들을 보았던 듯도 싶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집들에 오가는 관광객들만 <변호인>의 스틸컷을 흉내내고 있었다.
마당이 있어야 할 자리를 바다에 다 내 준 이 절벽 위 집들은 이처럼 곳곳 창문마다 화초들이 들앉는 풍경이 흔하다. 창살 틈새로 몸을 비집고 자라는 저 붉은 생명이 갯가 사람들의 생을 닮아 있다는 생각...은 좀 오버인가.
<캘리크라피>
그냥 예뻐기만 한 글씨와 장식품들이다. 그런데 이 예쁜 것들이 이 벼랑길 골목에 어울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 사는 원주민의 빠른 셈속인지, 아니면 외지인의 발빠른 선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예쁜 것들은 나라 안 변두리 재생 공간이면 어디든 있다. 절대 영도스럽지 않은, 희여울마을스럽지도 않은 이 풍경들...
절영해안로...흰여울마을길...산복도로...
흰여울마을의 벼랑길에서 꼬막계단을 걸어 내리면 저 아래 절영해안로로 내려설 수 있다. 이 마을에서 위쪽으로 난 찻길은 어릴 때 산복도로라 불렀던 길이다. 그 산복도로를 따라 영도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그 길들은 영선사-사격장-목장원 앞을 지나 태종대로 이어진다. 그리 지나는 동네들은 신선동-영선동-청학동...처럼 속세의 냄새를 모두 지운 것들이다. 그만큼 지상에서 먼 이름들이다. 그러나 그 삶은 예로부터 팍팍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들은 모두 '난장이'였다.
<영도구 신선동 3가 37-1번지>
-신선로터리, 제2영도교회, 명보극장-
내가 살았던 집번지다. 몇십 년만에 와 본 이곳에 어느덧 옛집터는 허물어지고 없다. 바닷길에서 올라와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엔 앳된 고등학생들이 뱉어 놓은 담배연기가 자욱했지만, 옛날의 그 어둑한 골목과는 달리 환한 채색과 그림이 뒤덮여 하굣길의 그 흔적을 모두 지워놓고 있었다.
신선로터리 주변의 상가들은 모두 간판은 바뀌었으나 옛건물 그대로인 집들도 몇 있었다. <명보극장>이 있던 자리는 진작 다른 건물로 바뀐 듯하고, 세월에 낡은 몸집을 화려한 네온과 채색으로 가린 옛건물들과 달리, 주일이면 과자 한 봉지로 주기도문을 외던 <제2영도교회>는 그 일대에 보기 드문 변신을 해보이고 있었다. 유리와 스텐으로 세련되게 몸틀을 바꾸고, 낡은 종이 위태롭던 첨탑은 옛날보다 더 높이, 더 견고하게 번뜩였다. 길과 길, 집과 집들을 이어주던 손금과도 같은 골목길들이 사라진 자리에 주차로 극심한 몸살을 앓는 대도시의 풍경이 자리잡았다.
주변에 남은 집들과 골목길들로 가늠해 본 옛집터...
부산남여상...부산영상예술고
로터리에서 내려 비탈길을 걸어오르면 그 비탈길 끝에 큰누이가 다니던 학교가 있었다. 한때 부산 시내에서 명문으로 소문났던 <부산남여상>이다. 어릴 때의 기억으로는 갖가지 화초가 자라던 온실이 여러 채였고, 정문 앞 연못에는 분수가 눈부셨다. 그러나 내가 남여상을 기억하는 가장 선명한 기억은 그 화단 한 켠에 자리잡았던 시비의 시구였다.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쪼개어도 소리내지 않는 한 개 바위가 되리라'.
무슨 뜻인지도 몰랐고, 이게 시의 한 구절이란 것도 몰랐다. 더구나 이 학교에 청마가 교장으로 있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던 때이다.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면서, 애틋한 로맨스로 포장된 이영도와 청마의 사랑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새삼 내 유년기 문학적 감각에 남몰래 혼자 뿌듯해 했던...ㅎㅎ
가끔, 부산으로 걸음하던 때가 있었다. 어릴 땐 런닝 차림으로 오르내렸던 저 비탈길과 영도다리를 건너 남항 선창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던 그 때의 기억들은 어느 것 하나 선명하게 남아있지 않아 자갈치, 남포동, 보수동, 혹은 국제시장으로 걸음을 옮길 때에도 영도다리를 건너 옛 고향집 자리를 들여다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허물어지기 전의 옛집을 볼 수 있었을까. 여름이면 뒷마당에 물을 뿌리고 비누칠로 미끄러지며 놀았던 집...사촌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일상으로 키를 키워갔던 집...
비좁고 불편했던 집이었지만, 사람사는 소리들로 밤낮없이 왁자했던 동네...그리고 그 집들과 집들을 이어주고 나누어 주던 골목길들...
낡아가는 것들이라고 그렇게 마구 없애고나니, 불현듯 그리워도 어쩌지 못하고 마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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