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

황순원 님의 시, <옛사랑>

naru4u 2022. 6. 10. 19:13
님아,
폭풍우가 지둥치던 그 여름날 밤
세상을 허물려는 빗발, 만물을 휩쓸려는 바람
그리고 피난민의 아우성 소리, 죽음의 비명
아 몸소리나는 그 속에 내 님은 내 손을 꽉 잡고 섰었다
사나이가 왜 그리 무서움이 많으냐고.

님아,
그것은 또 어느 늦은 가을 날 저녁
싸늘한 바람이 얼굴을 핥고 옆산에서 꿩이 울어
발 아래 바삭이는 낙엽이 옛보금자리를 그리워할 때
님은 내 가슴을 안고 힘찬 노래를 불렀었다
사나이의 정열이 한결 더 강해지라고.
그러던 님이 내 앞길을 인도해주던 그 사랑이
지금은 나를 떠났다. 내 마음 속을 떠나가 버렸다.

님아,
아무리 사정이 있었기로 옛사랑을 잊겠는가
아무리 옛사랑이기로 딴 님을 좇겠는가
사랑에 주린 사나이 님 잃은 나는 울고 있다
쩡쩡 얼음 갈라지는 강변에서 밤새도록
옛사랑 돌아오기를 빌며 빌며 울고 있다, 피나게 울고 있다

님아,
대장간 풀무에 타는 불꽃이 부럽지 않고
분화구에 뿜어 솟구치는 용암이 그립지 않은가
님아, 내 사랑아,
우리의 앞에는 다시 동반해야 할 험한 길이 놓여 있나니
돌아오라 옛사랑으로, 가면을 버리고 힘의 상징인 옛사랑으로 돌아오라.
ㅡ1933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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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에게 이런 시가 있었다. 님을 잃은 처절한 절규가 근 100여 년 저 너머에서 넘어온다. 소설 <소나가>의 그 담백한 사랑과는 다른 결이다. 누가 열 여덜 살 짜리의 가슴을 이토록 찢어 놓았는가.
열 여덟... 그 시퍼런 청춘이 새삼 슬프게 읽히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