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영화관...

TV가 우리집에 온 날...<007퀀텀 오브 솔리스>

naru4u 2008. 12. 1. 18:51

독한 맘 먹고 TV를 새로 장만했다.

결혼 5년...애들로 인해 마구마구 늘어나는 살림을 감당치 못해 절로 잔소리가 늘었지만,

그 잔소리를 쏙~ 들어가게 하는 한 마디는...역시 "애들한테 필요해"라는 말!

(나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부모가 돼가는 모양이다.)

아내가 어디선가 이것저것 꽤 유용한(아내의 기준에서) 자료들을 구했나보다.

아내는 한 달 전부터

"이걸 애들한테 보여주려면 컴퓨터와 TV를 연결해서 TV로 보는 게 좋은데..."라며

구닥다리 컴퓨터의 수명을 넌지시 일러왔다.

그래 "애들을 위해서라면...그깟 컴퓨터 바꾸지 뭐!"

어려워지는 국가 경제를 무시하고 우리는 사고를 쳤다. 그것도 최신형 노트북으로...

근데...요즘 컴퓨터는 구형 TV와 연결하는 케이블이 아예 지원되지 않는댄다. 이런 젠~장!

음성과 영상을 한 번에 원형처럼 송출하는 'HDMI' 방식이라나...?

며칠 째 노트북은 장식용으로 덩그러니 책상 한 귀퉁이에 방치돼 있었다.

그러고 또 며칠...아내는 조급증이 났나보다. TV를 사잰다. 내가 그리 바꾸자고 할 땐 싸늘한 표정을 짓더니...

카드 한도액을 넘겨가며 결국 TV를 샀다. 그것도 대형 벽걸이로다가...ㅠ(사람 욕심을 확인한 날이었다).

TV가 설치된 첫날 밤...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무료 영화 사이트에 내 정보를 헐값에 팔고 영화 하나를 다운받았다.

그리고 노트북과 TV를 'HDMI' 케이블로 연결했다. 그렇게 본 영화가 '007 퀀텀 오브 솔리스>였다.

==========================================================================================

영화를 보고 난 첫 마디는 "이거 뭐야~"였다. 나도 아내도...

007 특유의 위트나 알싸한 낭만이 없다. 그저 '죽이거나, 혹은 다치거나'였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주인공과 그 한 쪽엔 불안감과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M이 있었다. 반면, 007을 흠모하다가 결정적일 때면 그를 도와 위기를 벗어나게 하는 미모의 '본드걸'은 없다. 언제나 미완성이지만 미션 수행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비밀병기들을 정신없이 만들어대는 'Q'박사도 없다(하긴, 실제 그는 죽었지만, 그 전에 후임 한 명은 훌륭히 키웠다. 그런데 이번 편에는 존재감 없이 한 장면 나왔다가 별 내용없이 묻혀버렸다). 덩달아 비밀병기도 본드걸과의 로맨틱한 결말도 없다. 오로지 '죽이거나, 혹은 다치거나'로 일관했다. 수십 년 007에 목 말라했던 '메니페니'가 없는 탓일까, 007은 M의 사무실에도 잘 들러지 않았다. 대신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보았던 '영상데이터'나 '위치추적 휴대폰'을 이용한 대화 장면들만이 간간이 노출될 뿐이다.

아내나 나는 영화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007영화를 은근히 좋아한다. 007 시리즈를 다 챙겨 볼 정도의 열성팬이 아님에도 5대 '제임스 본드'였던 '피어스 브로스넌'을 극찬하던 아내에게 살짝 질투 섞인 불평을 늘어놓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번 007은 "이게 뭐야~"였다. 맘을 확~ 당길만한 서사도 없고, 가슴 알싸한 로맨스도 없고,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비밀병기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액션 영화였다는 느낌.

.

.

.

TV가 우리집에 온 날,

아들보다 더 설레는 맘으로 첫 영화를 보았다.

새로 산 노트북과 새로 산 TV가

'HDMI'라는, 처음 본 케이블로 내 눈앞에서 짝짓기를 하는 동안,

나는 헐값에 팔아넘긴 내 개인 정보들이 갑자기 아까워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