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

<기차>(안도현)

naru4u 2010. 5. 18. 23:36

<기차>

                                                                      *안 도 현*

 

삼례역에서 기차가 운다, 뿡뿡, 하고 운다, 우는 것은 기차인데

울음을 멀리까지 번지게 하는 것은 철길이다, 늙은 철길이다

 

저 늙은것의 등뼈를 타고 사과궤짝과 포탄을 실어나른 적 있다

허나, 벌겋게 달아오른 기관실을 남쪽 바닷물에 처박고 식혀보지 못했다

 

곡성이며 여수 따위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반하지 못하였으므로

단 한번도 탈선해보지 못했으므로 기차는 저렇게 서서 우는 것이다

 

철길이란, 멀리 가보고 싶어 자꾸 번지는 울음소리를

땅바닥에 오롯이 두 줄기 실자국으로 꿰매놓은 것

 

그 어떤 바깥의 혁명도 기차를 구하지 못했다

철길을 끌고 다니는 동안 서글픈 적재량이 늘었을 뿐

 

그리하여 끌고 다닌 모든 길이 기차의 감옥이.었다고

독방이었다고, 그 안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저도 녹슬었다고

 

기차는 검은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기어이

철길에 아랫배를 바짝 대고 녹물을 울컥, 쏟아낸다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2008)

 

땅바닥에 나란히 누운 철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근대 이전, 마차를 끌던 두 말의 간격은 21세기 최첨단 시대에 이르러서도 초고속 열차의 몸집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그 옛날 궁둥짝을 은근슬쩍 부딪쳐가며 마차를 끌었을 두 마리의 말들이 벌여놓은 저 간격...저 좁혀지지 않는 '사이'와 그 사이에 질러진 침목들이 수백 년 동안 실어날랐을 숱한 서사들이 낱낱이 궁금해지는 밤이 있다.

'시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의 물고기>(권지예)...  (0) 2010.07.06
<빈자리>...나희덕  (0) 2010.06.23
<빗방울에 대하여>...나희덕  (0) 2010.04.26
<백석(白石) 생각>(안도현)  (0) 2010.03.26
<공양>(안도현)  (0) 2010.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