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나 희 덕
찰칵, 슬라이드가 돌아간다
가야고분의 내부는
석실과 부장품을 넣는 곳으로 나뉘어 있다
큰 항아리에 곡식을 가득 담고
크고 작은 토기들을 몇단씩 쌓아놓았는데
부장품 옆에는 빈자리가 있다
꼭 한 사람이 누울 만큼의
빈자리
오로지 죽음을 위해 죽어야 했던,
저승길까지 따라가 고개 숙여야 했던,
죽어서도 칼을 놓지 못했던 사람
사람의 뼈와 살이
흙그릇보다 오래가지 못해
그의 손에 꼭 쥐었던 은장도만
녹슨 채 가라앉아 있을 뿐,
순장의 흔적은 빈자리로 남아 있다
찰칵, 슬라이드가 돌아가고
붉은 흙만 눈에 박히듯 들어온다
꼭 한 사람이 누울 만큼의
저, 저, 빈자리
======================'나희덕' 시집, <야생사과>(창비, 2009) 가운데.
텅 빈, 그 자리에 시인의 상상이 빼곡하다. 수백, 수천 년 저쪽의 일상 한 쪽이 시인의 상상을 따라 건너온다. 나는 그 풍경 한 쪽을 받아들고 문득 그 빈 자리에 몸을 뉘고 싶어졌다. 죽은 자를 위해 그 곁에 눕는 산 자의 마지막 숨결은 어떤 빛깔이었을까? 살아 있는 동안, 나도 누군가를 위해 그의 곁에 몸을 부리고 싶다. 아니면, 내 곁에서 나란히 숨결을 나누는 누군가를 만날 수만 있다면...'순장'. 수천 년을 지내오는 동안 빈자리로 흩어진 숨결을 한데 그러모아 보고 싶은 날들이다. 삶도 죽음도, 홀로 가는 일은 너무 외롭다. 나는 아직 이 외로움에 미처 길들지 못했던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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