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쓰나미', 흐릿해진 기억을 덮쳐 오다.
2004년 동남아에 밀어닥친 '쓰나미'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밖의 일이라, 그저 일상의 흥미로운 뉴스거리로만 접했던 게 사실이다.
2008년 중국 쓰촨성을 초토화 시킨 대규모 지진이 일었을 땐, 이 나라 안에서 아직 충격적인 지진의 경험을 갖지 못한 탓에 그 또한 그저 안타까운 나라 밖 소식 정도로 여기고 말았다.
그런데...
한낱 흥미거리로만 보아 넘겨도 좋은 영화 한 편에 다시금 지난 뉴스들을 들추어, 그 끔찍한 장면들 낱낱을 두 눈 똑바로 뜨고 흝고 있다. 영화 <해운대>의 후폭풍이 가져다 준 요즘 내 일상의 한 풍경이다.
#-2. 세련되지 못한 것들이 주는 '둔중한 슬픔'
<해운대>는 내 유년의 한 때, 마냥 즐거웠던 바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즐겁기만 했던 그 해안의 어느 귀퉁이에도 그렇게 눈물과 한숨으로 배밀이를 하는 생들이 있음을 나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질 못했다. 고층아파트들이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만들고, 도시문명의 화려한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해운대'. 내게 요즘의 그것은 세련됨이고, 정말로 도시스러운 기호이다. 그리하여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바다라 할 지라도 그저 '낭만'으로만 새겨지던 사치스러운 기호, '해운대'. 그 해운대에 밀어닥친 쓰나미는 모든 세련됨과 도시스러운 것들을 모조리 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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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 사치스러운 기호들이 모조리 휩쓸려가버린 그 자리에 오롯이 남은 것은, '촌스러운 할머니가 아들을 위해 산 또 그렇게 촌스러운 구두 한 짝', 그리고 '촌스러운 구급대원의 또 그렇게 촌스러운 손목시계', '촌스러운 사내와 그 어머니, 그리고 한 여자의 촌스러운 화해' 들이다. 그 촌스러운 것들에서 다시 눈을 돌리면, 이번엔 투박한 '인연'들이 장면 여기저기에 빼곡하다. 김밥을 팔던 할머니에게 건넨 잔돈 선심이 딸 아이의 목숨을 구하는가 하면, 동심으로 건넨 만 원 짜리 하나는 폐허 속의 희망들로 묶여 한 자리에 놓이고, 그 엄청난 쓰나미에도 쓸려가지 않은 붉은 천 한오라기는 파편화 된 두 남녀의 마음을 옹차게 엮는 인연의 끈이 되어 날아오른다. 그밖에도 하이힐의 굽에 의지한 마지막 생의 처절한 몸부림이 한낱 변기청소부에 의해 너무도 우스꽝스럽게 해결되어버리기도 한다. 그야말로 '옷깃만 스쳐도 인연'임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품 구상 과정에서 피천득의 '인연'이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는 감독의 설명답게 영화는 곳곳에 그러한 감독의 의도를 보듬고 있다. 연희(하지원)의 가겟집 이름을 '금아'(피천득의 호)로 따 온 것은 이러한 감독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
#-3. 피는 물보다 진하고, 쓰나미보다 강하다!
영화의 전반부를 끌어가는 서사의 한 축은 '핏줄'끼리의 갈등이다. '최만식(설경구)과 그의 작은 아버지 억조(송재호)', '만식 어머니와 만식(연희)', '동춘(김인권)과 동춘어머니', '김휘(박중훈)와 유진(엄정화)' 들의 관계는 모두 핏줄끼리의 갈등 관계를 드러내 보이는 구도들이다. '인생이란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피천득의 글귀가 이 영화의 중심 서사축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감독은 그 문장 하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핏줄의 여러 관계들을 의도적으로 설정해 그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어나간다. '인연설'은 동양의 전통적 감성코드이지만, 재난 영화에서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활용되는 키워드이다. <해운대>가 만들어 내는 여러 눈물줄기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핏줄'에서 비롯된다.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코를 훌쩍이면서 나는 다시금 내 몸 여기저기 솟은 핏줄들을 쓰다듬어 보았다. 가늘고 굵은 핏줄들 마다에 물컹, 그리움들이 잡힌다. 내 어머니, 내 아버지, 그리고 내 누이들......가끔은 번잡하고, 또 가끔은 그들로 인해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수십 년 동안 그 인연의 끄트머리를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살았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그것, '핏줄'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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