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
*한 하 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고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한하운, [가도 가도 황톳길], 예가, 1993
'문둥병 시인' 한하운. 그의 시에 줄줄 흘러내리던 피고름을 보았던 때는 내 나이 열 다섯이었다. 병을 다스리고자 어린 아이들을 잡아 먹는다는 세속의 말이 아직은 민간요법으로 떠돌아다니던 그 때에 '천형(天刑)'이라는 말도 처음 알았다.
전라도의 그 붉은 황톳길을 말없이 걸으며 그는 세상을 어찌 보았을라나. 자그마한 일에도 마음을 다쳐 길바닥에 주저앉고 마는 요즘의 나를 돌아본다. 참혹한 삶의 길 한가운데서도 시가 "막돼먹은 세상을 구원하리라" 굳게 믿었던 시인. 그리고 "시인들이 그 구원의 맨 앞자리에서 봉화불을 높이 쳐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소록도로 향했던 시인. 격리와 감금의 지배기술로 포장된 소록도로 향하면서도 그는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동료들을 껴안고 걸었다. 때론 서로 잘려진 발가락을 주워주기도 하고, 또 때론 흘러내리는 피고름을 닦아주기도 하면서. 마음을 다쳐 주저앉아 있다가 그의 시를 읽으면 불끈 다시 모세혈관 세세히 박동이 뛴다. 정작, 우리 시대에 그 같은 시 정신을 가진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손톱 하나, 발톱 하나 빠지는 일에도 요란을 떨며 엄살을 피는 요즘의 일들이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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