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치근대던 파도가 아침이 되어도 몸을 낮추지 않았다. 파도소리에 잠을 깨니 잔비 뿌리는 하늘이 바다 가까이 낮게 내려 앉아 있었다.
전날 폭풍검색으로 몇 집을 고민하다 비때문인지 얼큰한 국물이 땡겼다. 숙소에서 그닥 멀지 않은, 오늘 첫 여정인 묵호등대에서도 가까운 곳이라 선뜻, 걸음을 옮긴다.
9시도 안 된 아침..허름한 외관과 달리 벌써 좁은 계단에 대기줄이 생긴다(쬐끔 놀람).
근데 날더러 주인 할아버지가 혼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혼자는 앉을 자리가 없댄다. 헐~ 이게 뭔말인가 했더니 모든 테이블이 2~4인용인데 1인 손님이 앉으면 다른 2~4인 손님을 받을 수 없단 얘기다. 그럼 다른 손님과 합석해도 된다했더니 그건 알아서 하란다.
자기들이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진 않는다고...손님들이 싫어할 수 있으니 직접 다른 손님께 양해를 구해 보란다.
(이런 ㅆ~ 욕이 나올 뻔).
아침부터 나이 지긋한 양반과 실랑이 하기 싫어 돌아서려는데 앞줄에 있던 아가씨 둘이 자기네랑 합석하잰다. 자존심 팽개치고 고맙다고 하고 합석.
대개는 그집 주메뉴인 장칼국수를 주문하는 듯. 전체적으로 낡은 건물에 규모가 작다. 좁은 주방에 할머니인지 아주머니인지 두 분이 부지런히 음식을 만드시고 칠순이 다 돼보이는 바깥양반이 홀서빙을 한다. 합석한 아가씨들이 불편할까봐 불쾌한 표정을 감추느라 고개 푹~숙이고 폰질만...
몇 개의 메뉴가 더 있는 듯한데, 장칼국수가 이집의 대표 음식. 이게 장칼국수...근데 이미 삐뚤어진 마음때문인지 그닥 줄서서 먹을 만큼의 맛은 아니다. 얼큰한 맛으로만 치면 차라리 짬뽕이 낫겠다, 싶을 정도. 그 건물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의 어느 손님으로부터 번진 입소문일지도...
아무리 장삿속이라지만 나이 든 양반의 밥인심이 고약하단 생각. 오히려 갓 스물 넘겼을 법
한 어린 아가씨들의 마음씀씀이가 인정스러워 아가씨들 몰래 그들 밥값까지 계산하고 후다닥, 빠져 나왔다.
<묵호등대>
묵호는 작은 동네라 이동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듯하다. 묵호등대로 가는 길에 '논골담길' 벽화마을이 있다. 논골담길을 걷는 길은 크게 두 갈래. 수변공원쪽에서 묵호등대로 오르는 길과 묵호등대에서 출렁다리, 수변공원쪽으로 걸어 내리는 길이다.
난 묵호등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수변공원쪽으로 걸어 내리는 코스를 선택.
처음엔 흡연부스인 줄...그런데 꼬맹이들이 들락날락해서 가만히 보니 책들이 꽂혀 있다. 도서관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도서실쯤? 좀 생뚱맞은 풍경...
등대 입구 내벽엔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로 꼽히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돋을새김 돼 있었다. 개화기 근대 문물의 유입기에 새로운 각오로 신문명을 맞이하여야 한다는 주제 의식의 이 작품이 이 등대에 새겨진 까닭이 궁금했는데, 물을 데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될 날이 있으리라.
이밖에도 곳곳에 지역 시인들의 작품같은 시들이 투명 아크릴판에 새겨져 있었다. 바다를 온몸으로 겪어 온 그들의 일상이 그들의 시에 진솔하게 들앉아 있었다. 많이 배운 것을 티 내느라, 현학적인 시어들로 뜻도 모르게 상징들만 남발해 대는 시인들보다 이렇게 그들의 생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시들이 나는 좋다. 여행길 어디서든 한 자리에 꼿꼿이 서서 전시된 작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어낸 건 이번이 처음인 듯싶다.
모닥불 조형물...등대와 모닥불...상관성이 있는 듯, 없는 듯...
자꾸 의미를 찾으려는 이 몹쓸 지적 허영이 자꾸 바쁜 걸음을 늦춘다.
등대에서 내려다 본 절벽 카페...묵호등대 아래로는 몇 개의 카페들이 있다. 멀리서 내다 본 풍경이 다소 이국적이다. 산토리니였던가...가보진 않았지만, TV로 본 어느 해안 절벽의 카페가 이러했던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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